1. 현장에서 삶의 원리를 깨달음으로 주님을 온전히 인식함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한다.  현실에서 이 말이 얼마나 와 닿을지는 모르지만, 옛날 천대받던 가죽 장인 갖바치들 중에도 뛰어난 인물들이 있었음을 역사는 말해준다.  자신이 무엇을 하던 그 안에서 삶의 철학과 원리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7장은 백부장이라는 이름도 밝히지 않은 인물로 시작하는데, ‘백부장’은 centurion 즉 백명의 부하를 거느린 로마 장교였다.  이방인이었지만 유대민족을 사랑해서 회당도 지어준 인물로 기록되는데, 미루어 보아 아마도 유대교에 대한 존경심이 있었던 것 같다. 

 

그가 주님의 소문을 듣고 자신의 사랑하는 종 (아마도 유대인?)의 치유를 위해 초청했지만, 6-8절에는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라는 고백을 하여 주님을 놀라게 한다.  그의 고백은 주님의 만유의 주재 되심을 온전히 인정하는 발언인데, 이러한 깨달음은 그의 오랜 군생활에 의한 것이다.

 

주님은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다고 말씀하신다.  유대인도 아니고 종교지도자도 아닌, 더우기 침략국 로마의 장교인 이 이름없는 백부장은 그 믿음 만큼은 누구보다 뛰어났다.  믿음의 원리와 영적 권위 및 체계에 대해 그의 직업을 통해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학을 했다고, 혹은 목회자라고 모두 믿음이 좋고 올바른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갖바치 같은 천한 일을 해도 그 안에서 삶의 원리를 발견하고 믿음에 적용한다면 영적 원리를 깨달을 수 있고 주님께 칭찬 받는다.

 

2. 상황이 역전됨

 

모두에게 적용될 수는 없을지라도 복음은 상황을 역전시킨다.  과부의 아들을 살리시는 내용은 ‘과부’와 그의 ‘죽은 외아들’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보여주는데, 이 과부는 주님에게 가지도 않고 주님을 부르지도 않았지만, 먼저 주님께서 그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신다.  주님이 청년에게 일어나라고 명하자 그 죽은 외아들은 되살아난다. 

 

상황을 보니 변변한 장례 행렬도 아니고 단지 ‘죽은 자를 메고 나오’는 (12) 가난한 이의 장례다.  하지만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는 것을 보면 그 과부는 사람들에게 좋은 평판을 받은 인물이었던 것 같다.  상황이 아무리 나빠도 한 사람의 삶이 딤전 5장에서 보는 경건한 과부의 모습이라면, 복음은 이를 역전시킬 수 있다.  주님께서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기 때문이다.   이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예수의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졌는데, 나인성은 나사렛과 가까운 지방이지만, 소문은 멀리 남부 유대와 사방까지 퍼졌다.

 

3. 복음의 목적을 이해함

 

그렇게도 확신있게 예수님을 증거했던 요한이 주님께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라고 묻는다.  자신이 갇히고 보니 주님이 그가 기대하던 모습과는 다르다는 것을 비로서 느끼기 때문이다.  침례자 요한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 1:29)’ 라고 주님을 증거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세상의 정치적 권력 보다는 영적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으로 이해는 했겠지만, 주님과 더불어 자신이 계속해서 주인공으로 남으며 제자를 가진 것은 그가 온전히 주님을 증거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22-23절 주님의 대답은 요한을 만족시켰을까?  그에 대해 나오지는 않지만 요한은 감옥에서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비참히 죽었다.  그가 주님을 바로 앞에서 증거함으로 ‘선지자 보다 훌륭’하고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요한보다 큰 자가 없’을 정도로 위대한 사람이었지만 그의 임무는 여기까지였고, 바뀌는 시대인 ‘하나님의 왕국 안에서’는 가장 작은 자라도 그보다는 크다.  요한은 바로 앞에서 주님을 증거했지만, 복음으로 거듭난 이들은 그 삶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소유한 ‘성도’로서 주님을 나타내는 증인이 되기 때문이다.

 

4. 큰 복음 vs 작은 복음, 값싼 복음 vs 귀한 복음, 얕은 복음 vs 깊은 복음

 

주님께서 바리새인에게 초청을 받아 식사하시러 기대어 누우셨다.  36, 37절의 ‘앉다’는 말은 ‘비스듬히 눕다’의 의미로 유대인들이 식사하는 자세이다.  영화 벤허에서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자세를 취하면 발이 옆으로 노출 된다.  주님 방문 소식을 들은 죄인 여자가 그 자리에 왔는데, 무슨 죄를 지었는지 혹은 여자의 이름이 무엇인지 누가는 기록하지 않지만, 이 여자는 요한 복음의 마리아와는 다른 여자이다.  그런데 마리아도 이 죄인 여자도 모두 향유를 붓기 위해 병을 깨뜨린다.  보통 결혼식에 쓰이는 향유를 깨뜨린 것은 자신의 모두를 바친 것을 의미한다.

 

재미있는 것은 누가가 이 여자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이 여자가 막달라 마리아일 거라고 하는 이들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이 여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음으로 이 말씀을 읽는 이들은 자신과 연관지어 생각하게 한다.  주님께서 그녀가 ‘..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단지 한번 입맞추고, 한번 머리털로 닦은 것도 아니고 계속해서 입맞추고 닦고 했음을 보여준다.

 

복음이 나에게 얼마나 큰 의미이고 얼마나 중한지는 그에 대한 나의 반응이 보여준다.  복음은 값없이 받는 것이지만, 가치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그 어떤 것으로도 살 수 없기 때문에 은혜로 받는다.  그래서 싼 것으로 받으면 그 복음은 값싼 것이 되고, 작고 얕은, 영향력이나 생명이 없는 것으로 전락한다.  그래서 사모한 만큼 그 은혜를 누린다 (47).

 

나는 얼마나 큰 복음을 듣고 받았을까?  ‘예수님 믿으면 천당갑니다'는 복음이 아니다.  '모든 죄 사함받고 영생을 얻습니다’ 라는 말만 들었다면 복음의 전부를 들은 것은 아니다.  ‘죄 사함’과 ‘영생’이 무엇인지 안다면 그에 해당하는 나의 전부를 ‘들이 부음’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26:13과 막 14:9에는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고 말씀하신다.  ‘기념하다’는 단어는 ‘기억하다’와 연관이 있다.  주님께서 만찬에 대해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 22:19)’ 하신 것도 같은 의미인데, ‘기억’함을 말씀한다.  복음을 전할 때 사탕발림이 아닌, 그 모든 것을 드려도 부족한 것임을 상기시킴으로 온전히 전해야 한다.

 

주님, 나의 모든 죄를 사하셨고 나를 의롭게 하셨음을 믿고 감사를 드립니다.  하지만 기질적으로는 갈수록 나의 부족함이 드러납니다.  나의 죄가 큰 만큼 주님의 은혜도 큼을, 아니, 나의 죄보다 그 은혜는 항상 더 크심을 온전히 깨닫고, 시한부 인생으로서 사는 삶의 목적이 바뀌게 하소서.  복음이 정말 복음이 되고 생명이 될 수 있도록, 그 안에서 누림을 확장하소서.  오늘도 주님은 만유의 주재이심을 선포합니다.  여러가지 꼬인 것들을 푸실 수 있는 것은 주님의 명령이심을 인정합니다.  우리 안에서 풀려야 할 것을 주님의 이름 안에서 풀게 하소서.  묶을 것을 묶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