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절에는 주님께서 사역하실 때 함께 했던 이들이 우선적으로는 열두 제자들이지만, 그 외에도 여러 치유받거나 귀신이 나간 여자들이 자신들의 소유로 주님의 사역에 섬김으로 동참했음을 기록한다. 특히 열 두 제자를 언급한 후에 바로 막달라 마리아를 말하는데, 일곱 귀신 나간 과거(?) 때문에 별로 중요한 인물로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처음 주님을 만난 인물은 바로 막달라 마리아였다 (요 20장). 주님께서 죽으실 때에도 제자들은 주님을 떠났지만 계속 주님을 끝까지 따랐던 이들은 여인들이었음을 기록한다. 이들은 여자들이기에 많은 기록을 하진 않았지만, 주님 사역에 그림자처럼 따르던 참된 제자들이었다.
4절부터는 씨뿌리는 비유인데, 다른 복음서의 씨뿌리는 비유와 거의 동일하다. 우선 ‘씨’라는 단어는 ‘스포로스’로 남성 단수 명사이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 아예 이 단어가 명사로 쓰이지 않고 계속 동사형으로 쓰였고, 누가복음 역시 명사로 쓰인 것은 단 두번이고 모두 ‘(씨)뿌리다’의 동사로 쓰였다. 즉 (씨) 뿌리는 비유에서 씨는 분명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11절), 그 씨는 버려질 수도, 마귀에게 먹힐 수도, 자라다가 마를 수도 혹은 기운이 막혀 시들어 버릴 수도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 곳에 뿌려지고 어쩌면 세상에 충만할지 모른다. 그래서 이 비유의 주제는 하나님의 말씀인 ‘씨’가 아니라 그 ‘뿌려짐’에 있고, ‘어디’에 뿌려지는가 하는 데에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씨’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는데, 씨는 나무의 모든 DNA를 포함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장하면 동일한 씨를 내고 열매를 맺는다. 왜 주님은 ‘씨’를 말씀할까? 생각해 보니 사람이 타락한 것은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인데, 이 선악과를 ‘사과’로 이해할 때가 많지만 그것이 과연 어떻게 생긴 과일인지는 전혀 알 수 없다. 다만 신학자들 가운데서 오히려 ‘석류’를 닮은 과일이었을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에게 주신 음식은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 (창 1:29)’ 였다.
‘선악과’는 원래 이름이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이다. 즉 ‘선 혹은 악’이 아니라 ‘선과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이다. 이러한 나무에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열매에 또한 씨가 충만했을 것 같다. 그 씨에는 온갖 ‘상대적’ 선과 더불어 동시에 악도 함께 포함하는 지식과 정보가 들어 있었을 것이다. 알지 말아야 할 것을 알게 된 것이 병이 되었고, 사람에게 사망을 가져왔다. 그래서 사람을 살리는 것 역시 ‘씨’이다 (행 13:23, 벧전 1:23, 요일 3:9).
단지 ‘들을 귀’가 있어야 하고 ‘좋은 땅’이 되어야 비로서 씨가 성장하고 열매를 맺는다. ‘좋은 땅’은 ‘착하고 선한 마음’임을 말씀하는데 (15절), ‘착한’은 ‘칼로스 (이상적인)’ ‘선한’은 ‘아가또스’이다. 그런데 우리 마음은 이렇지를 않다. 그래서 주님께서 새로운 마음을 주셔야 하고, 우리 역시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선악과가 ‘지식’의 나무라면, 하나님 말씀인 씨는 ‘깨달음’을 요구한다. 무조건 ‘믿숩니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간직하고' 궁극적으로는 ‘인내함’이 따라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결실’이 있다 (15절).
재미있는 것은 13절 ‘바위 위에’ 떨어진 씨에 대해 부분인데, 이 사람은 말씀도 기쁨으로 받고 믿기도 분명 믿었다. 하지만 시련이 오니 배반하는 이들이라고 말씀한다. 믿으면 구원받는데, 이 사람은 믿었는데도 후에는 배반한다. 이 문제는 하나님의 입장이 아니라, 말씀이 ‘좋은 땅’에 대한 것이기에 우리의 입장을 말하는데, 하나님은 누가 온전히 구원받은 줄을 아시지만,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렇기에 한번 구원 받으면 어떻게 살아도 상관없다는 얘기는 결코 복음적이 아니다.
주님, 복음을 지식이나 정보로만 받아도 놀랍고 귀한 것이지만, 복음은 생명의 씨임을 봅니다. 이 생명은 주님의 로고스이고, 내 안에 뿌려졌으며, 자라야 하는 것임을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성장을 위해 인내가 필요함을 다시 봅니다. 성장이 더디다고 걱정하거나 인간적인 방법을 쓰거나 조급해 하지 않게 하소서. 다만 인내 아래 저를 두소서. 여러 가지 환경과 주님의 안배하심을 통해 우리 마음을 경작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