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미국 어느 교육국에서 당시 폴란드에서 유명한 교육 강사를 초청해서 컨퍼런스를 열었다. 폴란드 강사는 영어를 하지 못했기에 폴란드 말로 강의를 했는데, 통역은 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청중은 물론 내용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강사의 음성과 억양과 감정의 변화 구사로 여러 감동을 맛 보았다. 재미있는 것은 그 강사는 폴란드어로 구구단을 외우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얘기는 강사와 청중의 상반된 입장을 보여준다. 또한 설교자와 설교를 듣는 성도들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것이 있다. 설교자의 입장에서는 혹시 내가 준비한 것이 생명이 아니라 단지 모두가 이미 식상하게 들을 수 있는 구구단에 불과한가 생각해 볼 수 있고, 만일 구구단이라 해도 감정과 억양을 잘 섞어 전달하면 청중을 감동하게 할 수 있다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반면에 청중은 그 내용이 전혀 복음적이 아니라도 인간의 어떤 감정을 뒤흔들 수 있는 방법으로 전달 받으면 무언가 감동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물론 사실은 속은 것이지만) 만일 그 중에 폴란드어를 이해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어이가 없어 하거나 아니면 계속 웃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큐티를 나누다 보면 과연 내가 진정한 복음을 나누고 있는가, 나의 나눔에 생명이 있는가, 아니면 내가 어느 순간 매너리즘에 빠지거나 단지 의무감으로 하고 있지는 않나 라는 의구심이 들 때가 있다. 더우기 나의 나눔 만큼 내가 그 생명을 살아내고 있지 않는 것을 보면 사실 괴롭고 자괴감이 들 때도 있다.
16절에는 빛 비춤을 말씀하시다가 17절에는 ‘드러남’에 대해 말씀하신다.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는 것은 ‘비밀’을 의미한다. 헬라어의 비밀에 해당하는 단어 ‘미스테리온’은 무언가 감추인 것이 후에 드러나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래서 16-17절의 말씀은 죄가 드러나는 것을 의미하기 보다는 감취었던 비밀 (엡 3:9, 골 1:26) 에 대한 말씀, 즉 주님 당신에 대한 말씀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18절에서는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하시니라’ 고 말씀한다. 서로가 잘 연결이 안되는 것 같이 들리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라는 단어이다. ‘무엇을’에 대해서는 문제가 없다. 폴란드 강사는 구구단을 외웠지만 주님은 구구단이 아니라 생명을 말씀하시고, 그 생명은 씨 뿌려졌기 때문에, 씨 자체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 (물론 원수가 뿌리고 간 가라지의 비유는 이를 언급하기도 한다). 단지 여러 다른 종류의 땅에 떨어진 것이 문제이고, 이것은 ‘어떻게’에 해당한다.
그래서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 고 말씀하는데, ‘삼가라’는 ‘조심하다’라는 의미의 순 우리말이지만, 헬라어로는 ‘블레포’로 원 의미는 ‘보다’이다. 즉 ‘어떻게 듣고 있는지 보라’는 말씀이다. 여기에는 ‘듣는 (현재형)’ 문제와 더불어 ‘보는 (현재형)’ 문제도 함께 하는데, 자기가 어떻게 지금 듣고 있는지 그 태도를 보라, 인식하라, 주목하라는 의미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주의해서 보지 않으면 내가 들은 말씀, 내가 받았다고 생각하는 씨 까지도 빼앗기게 된다. 적어도 복음을 들었다면 그것은 생명을 받은 것인데, 그 받는 것에 주의하지 않으면 받았다고 생각될 때 잃을 수 있다. 이것은 신학적인 문제라기 보다 경험적인 문제다. 그래서 조심해야 한다.
19-21절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좀 너무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지금 주님은 계속 ‘하나님의 왕국’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왕국은 육신적 관계에 매이지 않고 오직 ‘생명의 씨 (하나님의 말씀)를 받아 행하는 (21절)’ 사람들의 관계다. 육신의 어머니와 가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 안에서 확장된 가족, 참되고 영원한 가족을 말씀하신다.
22절 부터의 말씀은 ‘주님의 임재’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주님께서 먼저 배에 오르시고 제자들은 따랐다. 거기에는 분명 주님의 인도하심과 임재하심이 있었다. 하지만 조금 후 제자들이 경험한 것은 은혜나 안전이 아니라 광풍으로 인해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험하게 된 것이다. 교회라는 성도들의 모임 가운데에는, 우리가 ‘느낄’ 수 없어도, 그 관계 가운데에는 분명 주님의 임재하심이 있다. 그것은 마 18:20에서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이다. 하지만 주님의 임재하심이 언제나 우리를 기쁨과 은혜와 안위로 충만한 경험을 하게 하진 않는다.
소위 성령이 충~만한 집회에 가면 무언가 공기가 좀 두터운 느낌을 받는데, 그래서 이러한 것을 경험하면 그런 느낌을 좋아하고 원하고 그리워 하게 된다. 하지만 ‘주님의 임재’는 그러한 것만이 아니다. 무언가 뜨겁고, 채워짐을 느끼며, 설명할 수 없지만 어떤 ‘거룩한’ 느낌 보다는 ‘믿음’이 먼저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신다. 주님은 우리 안에 계시고 또 우리 가운데 이미 계시기 때문이다.
주님, 말씀을 받을 때 혹시 이미 다 아는 식상한 구구단으로 받았는지 돌아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생명과 도전이 되시기 원합니다. 말씀으로 주님의 임재하심을 보기 원합니다. 오늘 성도들이 위험하고 불편한 풍랑을 통과하는 중에도 주의 임재하심을 의심치 않고 믿는 이들의 영 안에, 또 성도들 가운데 계신 주님을 붙들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