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말씀에 권위와 능력이 있는 것에 대해서는 백부장 종을 고치시는 것에서 봤지만, 어제 말씀에서는 같은 권위로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셨고, 그들은 곧 잔잔해 졌다. 오늘 말씀 역시 말씀의 권위를 보여주는데, 그 대상은 한 사람의 병이나 자연 현상이 아니라 더 나아가서 귀신들 (다이몬), 더우기 약 6,000 명 정도를 의미하는 ‘레게온’에 대한 것이다. 6천의 군사가 떼거지로 몰려온다면 (사람이라면) 당해낼 재간이 없을지 모르지만, 영적 권위는 이들에 대한 통제를 가능하게 해준다. 이 군대 귀신들은 주님을 만나자 마자 당황하며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 했다 (31절). 그들은 겉으로 보면 난폭하고 능력이 많아 보였지만, 가라면 꼼짝없이 가야하는 힘없는 존재들이다.
27절 번역이 조금 잘못됐는데, ‘..오랜 기간 귀신 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그는 옷도 입지 않고 집에 살지도 않고 무덤들 안에서 살았다’로 해야 한다. '무덤 사이'라고 번역한 것은 아마도 무덤이 복수라서 그런 것 같은데, 원어에서는 '사이'가 아니라 '안'으로 되어 있다. 인간의 삶은 혹시 화려해 보인다 할지라도 결국은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이 무덤에서 저 무덤으로 옮기는 무덤 안의 삶이다. 더우기 여러 가지 것들에 얽혀서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이끌려 다니다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28절은 이 사람이 예수님께 구하는 내용인데, 말은 사람이 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귀신이 하는 것이다. 가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지만 사망과 지옥을 내는 말을 할 때가 있는데, 돌아보면 이건 내가 한 것이 아니라 귀신이 한 것이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물론 주님을 믿는 사람이 귀신들릴 수는 없을 것이다 (요일 5:18). 하지만 나의 변화되지 못한 생각과 기질 속에서 귀신에 속한 것을 내가 말해낼 때가 있다.
성경에는 ‘귀신 들림’에 대해 두 가지로 말하고 있는데, 하나는 ‘귀신들리다’의 동사로서 ‘다이모니조마이’이다. 이것은 귀신 ‘지폈다’라고, 영어에서는 possessed 라고 보통 번역을 했다. 귀신에 의해 완전히 통제가 되는 것이다. 믿는 이는 이렇게 귀신에 ‘지필’ 수는 없다. 그런데 이 귀신 들린 사람은 원어에는 ‘소유하다’로 되어 있다. 즉 귀신에게 지폈다기 보다는 그 자신이 귀신을 소유한 것이다. 거듭난 사람으로서 귀신에게 지필 수는 없지만, (물론 이 사람이 거듭난 것은 아니다) 주님께 순종하지 않을 때 주님 외에 다른 영들을 소유할 가능성이 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이해하기 쉽지 않지만, 분명 주님을 믿는다고 고백한 이들에게도 가끔 귀신이 역사할 때가 있는 것을 보는데, 이것은 그 사람이 주님 외에 다른 것에서 위안이나 능력을 찾으려고 더러운 영을 놓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이몬이 ‘지폈’을 때 다이몬에게 통제함을 받지만, 마음은 거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귀신을 ‘소유’하게 되면 더 심각한 것인데, 의지적으로도 다이몬들을 불러서 붙잡아 놓기 때문이다. 최근에 귀신을 초청하는 식의 대사나 혹은 접신을 묘사하는 드라마들이 꽤 생기는데, 이것은 영적으로 매우 위험하고 무분별한 것이다. 장난으로라도 귀신을 초청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오직 주님의 이름을 부름으로 성령님에 충만해야 한다.
그런데 30절은 조금 희한하다. 이제까지 이 ‘다이몬’은 단수로 기록됐고, 주님께서도 ‘네 이름 (단수)’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 하지만 귀신이 ‘레게온, 군대’라고 대답하자 그 때부터 ‘다이모니아 (복수)’가 된다. 한 사람 안에 들어가서 단수의 다이몬으로 보이지만, 원래는 복수의 다이모니아이다. 하지만 주님과 대화할 때는 마치 단수같아 보인다. 이것은 이 다이몬들이 일사분란한 존재들임을 말한다. 즉 귀신들은 떼거지로 덤비는 오합지졸이 아니라, 그들 안에 체계가 서 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마 12:26에서 ‘사단이 만일 사단을 쫓아 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영적 권위에 대한 실마리를 주는데, 귀신에 대해 일일이 대응하고 대항할 것이 아니라, ‘군대’라도 하나의 존재로서 권위로 대응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소위 ‘축귀’를 할 때 귀신이 여럿 들었다고 하나 하나 축귀 하는 것이 아니라, 한번에 모두 쫓을 수 있는 것이다. 일곱 귀신 나간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축귀 사역에 대해 자세한 내용이 없지만, 오늘 말씀으로 비추어 보아 주님은 아마도 하나 하나 일일이 불러서 쫓아내시진 않았을 것 같다.
또 하나의 의문이 등장하는데, ‘돼지 떼’가 있고, ‘치던 자들 (34절)’이 있다. 이슬람교도 그렇고 유대교도 그렇고 돼지는 부정한 동물로서 사육하지 않던 가축이었다. 그런데 이 지방은 돼지를 떼로 사육했다. 그러고 보면 이 지방은 유대교와는 다른 이방인들의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주님의 주요 사역 대상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마 10:6)’ 이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 외에도 이방인을 상대로 사역하셨던 예는 성경 여럿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는 돼지 떼들의 희생이 있었지만, 귀신 들렸던 자는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치에 앉아’ 있게 되었다. 한 생명이 구원받았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주님은 바로 귀신 나간 사람을 ‘보내’시고 (38절),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말하라’ 명하시고, 그로 인해 온 성 내에 주님의 행하심이 전파된다. 그는 귀신이 나가는 은혜만 체험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 ‘보내심 (사도와 관련된 단어)’ 받고 그로 인해 주님을 전파했다.
주님, 나의 생각, 나의 기질, 나의 혼(魂)이 제멋대로 말할 때 귀신(鬼)이 말하고(云) 있음을 봅니다. 이 아침에 내가 잡고 있던 나의 혼적인 부분을 놓아 보내주기 원합니다. 초혼(招魂) 하지 않고 주님의 이름을 부름으로 영에 충만하기 원합니다. 나의 입에 자갈 물립니다. 주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말을 하게 하시고, 나를 통해 귀신이 울부짖지 않게 하소서. 주님의 그 말씀의 권위가 오늘 나를 사로잡으시며, 또한 자유롭게 하시기 원합니다. 주님 안에 온전히 묶일 때에 내가 참으로 자유합니다. 저를 주께 묶으소서. 그 말씀의 권위와 능력 아래 있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