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혹은 ‘사람 일은 관뚜껑 덮을 때까지는 모른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복음은 완전히 끝난 것 처럼 보이는 것도 아직은 끝이 아님을 말씀한다. 관 뚜껑이 덮힌 후에도 거기에는 부활이 있다. 그리고 심판이 있고 상 혹은 벌이 있다. 그래서 복음은 믿을 때 소망을 준다.
오늘 말씀에는 두 여자가 나오는데 하나는 열 두 살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고, 다른 하나는 열 두해 동안 혈류증으로 고생한 이름모를 여인이다. 모두 12라는 수를 가지고 있는데, 12는 완성의 수이고 끝을 의미한다. 딸은 12살 되어 죽었고, 여자는 열 두해 동안 피가 흐르는 병으로 고생했다. 그리고 이 두 이야기는 서로 겹친다. 회당장 딸로서 12살된 이 아이는 유복하게 자랐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병이 들어 죽는다. 여자는 열 두 해 동안 피 흐르는 병으로 그 고생은 말할 수 없었겠지만 아무도 고칠 수 없었다.
그런데 여자가 주님의 뒤로 와서 그 옷가를 만졌을 때 즉시 그 병이 그쳤다. 12년 동안 혼미하게 살다가 이제 정신이 든다. 새로운 시작이다. 모든 사람들 앞에 말할 때 주님은 그녀에게 믿음으로 구원 받았음을 선포하시고 ‘안심하고 평안 안으로 가라’ 고 말씀한다.
49절은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마소서 하거늘’ 이라고 하는데, 야이로의 딸을 ‘당신의 딸 your daughter’이라고 말한다. 당시에 그런 식으로 말했는지 모르겠지만, ‘이제 죽었어요. 다 끝났어요. 당신이 와봤자 소용 없어요’ 라고 들린다. 이에 대해 주님께서는 50절에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대답하신다.
그런데 그들은 두려워했을까? 누군가가 죽으면 슬퍼하고 걱정하며 안타까와 하는 것이기 때문에 '걱정하지 말아라'가 맞는 대답인 것 같지만 주님은 ‘두려워 말라’고 말씀한다. 생각해 보면 내 안의 많은 염려와 슬픔과 안타까움의 근원은 ‘두려움’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실패에 대한 두려움, 관계에 대한 두려움 등등이 염려와 오해를 낳게 한다. 그리고 이 두려움의 근본 원인은 죄이다. 이에 대한 해답은 두려움을 버리고 주님 안에서 믿는 것이다. 믿을 때 끝은 더 이상 끝이 아니고 새로운 시작이 된다.
주님은 아이가 죽은 것을 알고 계셨지만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한다. 사람들은 비웃었지만, 복음이신 주님께서 함께 하실 때, 모든 것의 끝이라고 생각되는 죽음은 단지 잠간 잠을 자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믿는 자들의 죽음에 대해 ‘잔다’라고 말한다 (고전 15:20, 살전 4:13-14). 자고 난 후에는 ‘일어남’이 있다 (54, 55절).
주님, 여러 상황에서 좌절과 포기와 두려움을 경험합니다. 복음을 받은 자로서 온전한 소망 안에 서게 하소서. 끝나도 끝난 것이 아님을 믿게 하소서. 주님의 능력은 우리의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십니다. 복음을 전혀 받지 않을 것 같은 이들을 위해서도 계속 기도할 수 있는 믿음과 소망을 주소서. 구원하시는 이는 주님이심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