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27절은 '죽음을 맛보기 전에 하나님의 왕국을 볼 자들도 있'음을 말씀하며 하나님의 왕국은 이 현실에서 맛볼 수 있는 것이지만, 진정한 그 실현은 죽은 후일 것임을 암시한다. 그 이유는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의 히 9:27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한번 죽고, 영원한 생명으로의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왕국은 온전히 이룬다.

이 구절과 동일한 말씀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도 발견된다. 16:28은 한글 킹제임스 번역이 잘 되어 있는데,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들 몇은 인자가 그의 왕국으로 오는 것을 볼 때까지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고 되어 있다. 또 막 9:1에는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고 기록한다. 내용에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나님의 왕국이 임함을 보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분명히 주님의 재림에 대한 말씀은 아닐것이다.

마태복음의 이 내용은 마지막 절에 놓여서 금방 이해가 되지 않지만 마가복음은 9 1절에 놓고 바로 2절의 변화산을 기록하기 때문에 이 말씀이 변화산을 의미하는 것임을 눈치챌 수 있다. 즉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육신의 죽음을 맛보기 전에 변화산에서 영광스런 주님의 참 모습을 보았는데, 주님께서 바로 하나님의 왕국의 본형이시고 전부이심을 본 것이다. 그런데 마태와 마가는 '엿새 후에' 변화산 체험이 있었다고 기록하는데, 누가는 '팔 일쯤'라고 기록한다. 누가는 의사로서 정확한 기록을 원했을텐데 왜 다른 복음서와는 다르게 '팔 일쯤'라고 했을까? 마태와 마가는 '엿새 후' 즉 만으로 6일 후를 말하지만 누가는 '팔 일쯤이 되어 (에게네토)' 즉 말씀하신 날과 변화산의 날을 포함하여 팔 일쯤이라고 기록한다.

재미있는 것은 요한복음에는 이 변화산에 대한 기록이 없다. 승천에 대한 기록이 없는 요한복음은 이 변화산에 대한 기록도 없는데, 그 이유는 이미 하늘의 왕으로서 오신 주님은 변화를 보여주실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복음은 이에 대해 다른 복음서의 '엿새 후'보다 '팔 일쯤'을 기록함으로 요한복음에 변화산 기록이 없는 것을 보충해 준다. '엿새'는 인간의 창조를 암시하지만, '팔 일'은 인간의 부활 그리고 그 이후의 모습을 보여준다. 지난 26절은 '인자도... 올 때에'라고 말씀하며 이것을 더 설명해 주는데, 변화산의 모습은 주님의 영광을 보여주는 것이 핵심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누가는 '팔 일쯤'을 말하며 주님과 함께 그 날에 우리도 변화할 것을 암시한다. 겉으로는 당시 그 어느 누구와도 외모상 차이가 없던 주님이시지만 변화산에서는 완전히 영광스럽게 변형되심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난 것으로 더욱 분명해지는데, 만일 주님만 영광스럽게 변형되신 모습만 보였다면 우리와는 별 상관이 없을 수도 있지만, 이미 죽은 모세와 엘리야 역시 '영광중에 나타나서 (31)' 주님과 대화한다. 안식 후 첫날 부활의 날과 팔일 째 왕국을 사는 그 영광을 보여준다.

제자들은 깊이 졸다가 깨어서 베드로는 주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해 초막 셋을 짓자고 얘기하는데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했다. 즉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고 지껄인 것이다. 그래서 구름이 덮히고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 말씀이 있고 난 후 '오직 예수만 보'임으로 (36) 그들에게 깨달음을 준다. 우리에게 생명 주시고 부활의 능력으로 일으키실 분은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시다.

변화산에는 영광이 가득했지만 다음 날 산에서 내려오니 현실에서는 악함을 맞닥뜨린다. 이번 케이스는 좀 특이한데, 어느 사람의 외아들에게 '귀신이 그를 잡아 갑자기 부르짖게 하고 경련을 일으켜 거품을 흘리게 하며 몹시 상하게 하고야 겨우 떠나 가 (39)'는 것이다. 즉 귀신이 떠나지 않고 몹시 상하게 하고 떠났다가 또 돌아온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주님은 ',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라고 탄식하신다. 믿음이 없을 뿐만 아니라 '패역한 세대'인데, '패역' '굽다, 왜곡하다, 돌아서다' 등의 의미이다. 제자들에게도 능력이 있었지만 그들은 능히 내쫓지 못했는데, 그 외아들은 믿음없고 패역한 세대를 대표하기 때문이다. 주님은 이제 곧 떠나셔야 하는데 이 세대는 계속 믿음이 없고 패역하다. 그래서 귀신이 떠났다가 다시 들어오고 몹시 상하게 한 후 다시 떠나는 조롱을 당한다. 주님은 그를 고쳐주시지만, '다시는 죄를 범하지 ( 5:14, 8:11)' 않음이 없고, 믿음에서 떠나 패역하게 되면 언제 다시 귀신이 돌아올지 모를 일이다. '이 세대'에서 벗어나려면 주님을 생명으로 취하고 주님을 따르는 것은 필수임을 보여준다.

주님, 주님의 변형되심은 주의 신성과 영광을 분명 보여주신 사건이지만 그를 통해 우리도 주님과 같이 될 것임을 미리 봅니다. 그 날을 소망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주님과 세상 사이에서 갈피를 못잡고 방황하며 결국 몹시 상하게 되는, '이 세대'로서의 경험도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주님을 온전히 좇을 수 있도록, 내 안에서 더욱 역사하시고 주님의 생명으로 채우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