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은 헬라어로 쓰였지만 주님은 대부분 아람어로 말씀하셨다고 한다. 구약의 히브리어는 유려해서 시적이므로 독창적인 느낌과 해석이 나올 수 있지만, 역시 구약 여러 곳에서 쓰인 아람어는 비교적 시제가 정확했다고 한다. 하지만 신약은 대부분 헬라어로 쓰였는데, 주님께서 헬라어도 사용하셨을 거라는 짐작은 있지만 대부분 아람어를 쓰셨을텐데 신약은 헬라어로 기록된다. 후에 로마가 세계를 재패하자 라틴 성경이 득세하게 되어 로만캐톨릭에서는 라틴 성경에만 권위를 부여한다.
신약이 헬라어로 기록된 것에는 이유가 있는데, 당시 코이네 그리크 즉 평민들이 사용하던 일반적인 헬라어는 헬라어 특유의 확실한 정확성이 있지만 동시에 매우 쉽게 이해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시제도 여러 가지 일뿐만 아니라, 독일말처럼 기본적인 단어를 갖다 붙혀서 또 하나의 단어가 되게 하는 것이다. 라틴계열 언어들에 비해 우리말은 조사는 발달되었지만 전치사나 시제 관사 등은 그리 정확하지 않다. 그래서 원어를 비교해서 읽어보면 재미있는 것들을 발견하게 된다.
46절은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났다고 하는데, 원어는 '그들 안으로 그들 중에 누가 큰지 말다툼이 들어왔다'고 번역할 수 있다. 즉 그들 가운데 변론이 스스로 일어난 것 보다는 '그들 안으로 들어왔다'는 표현을 한다. 물론 죄된 인간으로서 누가 높은지는 항상 따지고 싶어하고 그에 따라 서열을 정하려고 하지만, 이 문제는 순수한 의도라기 보다는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는 요 13:2의 말씀처럼 마귀가 주는 생각 혹은 마음이다. 주님 만을 주로 섬기고 '너희는 다 형제니라(마 23:8)'는 주님의 말씀을 저버리는 것이다.
'변론'이라는 단어는 '디알로기스모스'로 영어의 'dialogue' 즉 '대화'의 어원으로 생각되는데, '디알로기조마이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오다)'가 어원이다. 그래서 '자신의 의견, 생각, 목적' 또는 '의심, 의구, 쟁론, 변론' 등의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교회의 사역들을 위해 많은 모임이 있는데, 서로의 생각을 교환하고 자신의 의견을 말하며 그 중 독창적이고 도움이 될 만한 것들로 의견을 모아 실행하게 되지만, 사실 이러한 것은 세상 모임이나 회사 경영의 모습과 전혀 다를 것이 없다. '내 생각'이나 '의견'은 내려놓고 서로 주님 앞에 기도함으로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 변론이 단순한 변론이 아니라 '그 마음에' 있음을 아셨다 (47절).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세우시고 말씀하시는데, 이 어린 아이는 '파이디우'로서 중성 명사다. 즉 남자 아이였는지 여자 아이였는지 정확하게 기록하지 않는다. 만일 남자 아이였다면 그 성별에 대해서도 또 누가 큰지 변론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48절에는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 고 답하신다.
영어에는 in my name으로 되어 있지만, 원어에는 on my name으로 되어 있다. 보통 '내 이름으로'는 'en'이라는 전치사를 쓰지만 여기에는 '에피, on'을 썼다. 즉 주님의 이름 '안'으로의 문제까지라기 보다 주님의 이름 '위'인데, 이것은 주님의 이름 '때문에' 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것은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고 주님을 영접하는 것은 그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확대하신다.
그러면 '영접'이란 무엇일까? '데코마이'라는 단어로서 '손으로 잡다, 취하다, 깊고 특별한 관계를 거부하지 않다, 말이나 가르침을 받다' 등을 의미한다. 즉 의지적으로 무언가를 단단히 취하고 놓지 않는 것이다. 즉 누가 크냐라고 변론하는 것은 그 안에 서열을 정해서 일이 잘되게 하려는 의도 보다는 관계를 깨뜨릴 수 있는 문제가 된다. 그래서 '너희에게 속한 모든 이들 안에 상대적으로 작은 이, 그이가 크게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한다. '크게 되는' 것의 시제는 미래형인데, 제자들은 현재 그들 가운데 누가 큰지에 대해 관심이 있었지만 주님은 크게 되는 것은 미래의 문제이고 다른 이들과의 비교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크게 되는 것임을 말씀한다.
전에는 이 구절이 자신을 낮추며 겸손한 이들이 큰 자라고 이해했고, 어떤 설교자는 어린 아이들이 어른들에게 완전히 의지하는 것 처럼 주님을 의지해야 함이 그 교훈이라고 하는 것을 들었는데, 그러한 견해도 물론 중요하지만, 오늘 묵상해 보니 그 보다는 현재 우리는 모두 다 고만고만하다는 뜻으로 이해가 된다. ㅎㅎ 다만 우리 가운데 작고 힘없어 보이는 이들을 영접할 때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고 이는 나아가 주 보내신 아버지를 영접하는 것이며, 그러한 관계 가운데 우리는 미래에 '큰 자'가 될 것이다.
이 두 구절 밖에 안되는 것에 대해 이 아침에 이렇게도 시간을 쓰며 묵상한 이유는 우리의 모습이 제자들과 너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교회라는 '공동체'에도 어느 순간 직분이 계급으로 이해되기 시작했고, 관계보다는 '효과적인 일처리' 혹은 '교인 관리'가 우선되고 있다. 공동체 내에서는 그 누구도 다른 이보다 높거나 낮지 않다. 다만 주님만이 지도자시며 랍비이시고, 우리는 모두 다 고만고만한 형제들이다.
주님, 주님은 오히려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로 오셨는데, 우리는 항상 남과 비교해서 나의 위치를 찾으려는 마음이 생깁니다. 주님, 이러한 가련한 죄성에서 구원하소서. 온전히 이러한 잘못된 관계에서 투명하고 해방되게 하셔서 주께서 기뻐하시는 서로 사랑하고 영접하는 관계로 이끄소서. 나의 의견은 완전히 내려놓기 원합니다. 주님의 뜻만 말해내고 따르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