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율법교사가 주님께 질문을 한다. 율법사는 모세의 율법을 다루는 전문인이기 때문에 무엇을 ‘하거나’ ‘하지 않는’ 문제를 항상 주의한다. 그래서 주님께서 ‘복음’ ‘회개’ ‘천국’ ‘영생’ 등을 말씀하시자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상속받게 되겠습니까?’ 라고 묻는다. 구약의 여러 구절에서는 ‘기업 상속’이 율법을 지키는 ‘행위’의 결과로 들릴 때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래 근본 원리는 ‘행위’ 보다는 ‘하나님의 백성됨’이 먼저다. 그래서 ‘장자권’이 많이 언급된다. 그런데 정체성을 잃을 때 다시 ‘행위’만을 중시하게 되는데, 오늘 이 율법교사가 그렇다.
율법 교사의 질문에 주님은 그에 맞게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라고 되물으신다. 한국어 번역은 거의 이렇게 반말로 번역 했지만 아마도 우리 정서에 맞게 번역 된다면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당신은 어떻게 읽으십니까?’ 라고 존댓말로 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율법사 답게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라고 대답한다. 이 내용은 구약에 있는 많은 명령 중에 율법사에게는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는 구절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이 율법사는 이렇게 대답한다. ‘행위’를 중시하는 율법사가 이런 답을 하는 것은 놀라운 것인데, 아마도 이미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을 들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마 22:37, 막 12:30).
즉 율법 보다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함’으로 답했는데, 원어를 보면 ‘아가페하라 (미래시제) 주 너의 하나님을 너의 온 마음 밖으로 그리고 너의 온 혼 밖으로 그리고 너의 온 힘 밖으로 그리고 너의 온 생각 밖으로 그리고 너의 이웃을 네 자신 처럼’ 이라고 되어 있다. 즉 ‘사랑하라’는 동사는 한번이지만, ‘너의’ 라는 단어는 여섯 번이나 나온다. 우리말 번역 처럼 한번이면 될 것을 왜 모든 기준에 ‘너의’ 라는 말을 붙였을까? 이 구절은 원래 구약 신명기 6:5을 인용한 것인데 역시 우리 말 번역은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했지만 히브리 원어에는 각 부분마다 ‘너의’를 의미하는 단어로 되어 있다.
그 이유는 ‘사랑’은 관계의 문제이고 ‘너’로 시작하며 ‘너’는 관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특히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냥 멀리 있는 신적 존재일 뿐이지 나와는 상관없다. 마찬가지로 이웃도 단지 옆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나와는 상관이 없지만 ‘나의’ 이웃이라면 내 자신처럼 사랑하는 관계로 엮어진다. ‘나의’ 하나님과 ‘나의’ 이웃을 ‘나의’ 마음과 ‘나의’ 혼과 ‘나의’ 힘과 ‘나의’ 생각으로 아가페하라고 명하신다. 즉 이것은 율법을 지키거나 행위가 먼저가 아니라 관계를 세우는 것이 먼저임을 말씀하는 것이다.
이제까지 머리로만 이 구절을 이해하고 있던 율법사는 그래서 ‘과연 그렇다면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 라고 묻는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시기에 이에 대한 질문은 나중이지만,) ‘그렇다면 주님이 말씀하는 ‘이웃’은 과연 누구입니까? 말씀하시면 내가 그렇게 사랑해 보지요’ 라는 말이다. 전형적인 율법사, 그리고 율법주의자의 모습이다. 그리고 나의 모습이다.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다 하지요. 그게 뭐 어렵습니까?’ 라는 교만이다.
하지만 주님의 예화는 그를 놀라게 한다. 소위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얘기를 하시고 ‘…누가 … 네 이웃이 되겠느냐’ 물으시자 율법사는 ‘사마리아인 입니다’ 라고 답하지 않고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라고 말한다. 그리고 주님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한다.
주님께서 ‘삘레오하라’ 하지 않으시고 ‘아가페하라’ 하신 것이 ‘관계’의 비밀이다. ‘φιλέω’는 ‘감정’이 많이 개입되는 사랑이지만, ‘아가페’는 ‘의지’ 혹은 ‘우선 순위’의 문제이다. 관계 가운데 우리의 마음을 편하고 기쁘게 만드는 것들은 그 안에 있기가 쉽지만, 의지나 인내가 필요한 관계는 사랑이 아니라고 느낄 때가 많다. 하지만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마음 혼 힘 생각’ 등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하실 때는 그 '사랑'이 만만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그 종교적 책임이라는 이유로 강도 만난 이를 피해 갔을 수 있다. 하지만 강도 만난 이와는 전혀 관계없고 오히려 적대관계에 있던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동했다. 그리고 그가 해야 할 일을 의지를 가지고 행했다.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다음날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고 말한다.
과연 이 사마리안인은 누구인가? 여러 해석이 있지만 예수님 자신을 말씀하는 것 같다. 요 8:48에는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라고 한다. 유대인들은 주님을 사마리안인이라고 조롱했다. 속된 말로 순수하지 못한 ‘튀기’ 라고 부른 것이다. 이런 사마리아인에게 도움을 받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하지만 이 선한 사마리아인은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었다. 주님의 어떠하심을 본다. 더우기 다음날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신다. 데나리온은 하루 품삯으로 그리 많은 돈은 아닐지라도 아마도 그 사마리아인이 당시 소유했던 모든 것이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고 말씀한다. (어떤 이들은 이 데나리온 둘을 '은혜와 진리'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또 아마도 이틀에 해당하는 품삯이라 주님의 재림은 주후 2천년이라 해석한 것도 있을지 모르겠다)
주님, 아가페는 측은히 여기는 감정도 있지만 그 보다는 의지의 문제임을 선한 사마리아인의 예를 통해 보여주심을 감사합니다. 주님을 위해 뭔가 할 수 있다는 교만을 내려 놓습니다. 무언가 일을 함으로 의롭게 되고 또 주님께 영광돌리겠다는 생각도 헛된 것임을 압니다. 교회 일을 할 때도 ‘시켜주시면 다 하겠습니다’ 라는 태도를 갖기는 하지만, 그 시키는 일 가운데도 내가 하고 싶은 것만 골라서 할 때가 많은 저를 보며, 단지 구할 것은 주님께서 내 안에 거하시고 풍성히 거하시기를 구합니다. 주님의 그 능력의 힘이 저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소서. 나의 어떠함을 뒤집어 나의 하나님을 아가페 하며 또한 나의 이웃을 아가페 함을 배우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