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주님의 약속에 근거한 미래의 것들을 현실에서 취하고 누리는 것이다 (히 11:1). 기도는 믿음으로 해야 하는데 (약 1:6), 그래서 바라는 것과 구하는 것들에 대해 이미 주셨음을 믿음으로 기도해야 한다 (막 11:24). 주기도문을 보면 이러한 것들이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먼저 주님께서는 ‘우리 아버지여’ 라고 부르라고 하신다. 엄밀히 말해 당시는 아직 주님 외에는 그 누구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었다. 하나님의 생명이 아직은 사람들에게 주어지지 않았고 그들은 믿음으로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야 비로소 주님께서는 ‘…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고 말씀하신다 (요 20:17). 제자들을 ‘형제’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때가 처음인데, 하나님이 이제는 더 이상 비밀스러운 ‘호 떼오스’가 아니라 ‘너희 하나님’이 되셨고, 또한 ‘너희 아버지’가 되셨다. 왜냐하면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이 제자들에게도 주어졌고 이를 통해 그들은 믿음으로 주님의 형제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생명의 해방이 있기 훨씬 이전에도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마 5:16, 45, 48 등). 즉 시간적으로는 그들이 아직 죄인들이었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었음에도 주님께서는 하나님을 ‘너희 아버지’라고 말씀하신다. 그 이유는 미래에 그들이 자녀됨을 믿음으로 보시고 말씀하신 것이다. 교회에 새로 들어온 사람들 중에 믿음이 아직 없는 사람들에게는 엄밀히 말해 ‘형제 자매’로 부를 수는 없지만, 후에 그들이 믿음으로 주님을 영접할 것을 믿고 ‘형제 자매’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 때의 ‘우리 아버지’도 아직은 비밀에 쌓인 분이시다. 원어에는 ‘아버지여, 우리의, 그, 안에, 그, 하늘들’ 이라고 되어 있는데, 별로 필요할 것 같지 않은 정관사 ‘그, ho’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어에서는 Our Father which art in heaven 이라고 which라는 단어를 썼다. 주님께서 온전히 아버지를 계시해 주셔야만 우리는 아버지를 알 수가 있다.
영어에서는 각 부분마다 ‘your’이라고 원어처럼 번역했지만 우리 말 번역에서는 2인칭 대명사를 모두 생략했다. 전의 나눔처럼 이 2인칭 대명사인 ‘당신의’가 매우 중요한데, 우리와의 관계를 말씀하기 때문이다. 우리 말의 ‘당신’은 3인칭 대명사로서는 극존칭이지만, 2인칭으로 쓰면 부부 사이 외에는 별로 좋게 들리지 않기 때문에 보통 주님에 대해서는 '당신' 보다는 ‘주님의’라고 말한다. 하지만 원래는 2인칭, 즉 바로 앞에 계신 분 처럼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 (수동태)’셔야 하고, ‘당신의 왕국이 오셔야 (능동태)’야 하며 ‘당신의 뜻이 되어야 (수동태)’ 한다.
위의 3가지에 대한 시제는 아오리스트지만, ‘우리의 빵을 우리에게 날을 따라 주소서’의 ‘주소서’는 현재 진행형이다. 예전 번역은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고 해서 마치 근래의 며칠 먹을 것을 충분히 달라는 것으로 오해하게 했는데, 말 그대로 ‘일용할’ 빵이다. 며칠 분의 양식을 쌓아 놓는 것이 아니라 ‘날을 따라 (단수)’ 지금 달라고 구하라는 말씀이다. 여기에는 ‘에피우시온’이라는 신약에 마태복음의 주기도문과 더불어 단 두번만 나온 단어가 있는데, 그 어원도 확인하기 쉽지 않고 그 뜻도 분명하지 않지만, 추측하기로는 ‘그 다음’이라는 의미가 있다. 즉 하루 먹을 양식을 구하고, 또 다음 날이 오면 또 구한다는 의미이다. 요즘처럼 먹을 것이 풍부했던 적은 역사상 그리 길지 않았다. 그럼에도 하루 먹을 양식은 그 날 구함으로 주님을 의지해야 한다. 마태복음 6:9의 시제는 누가복음과는 달리 아오리스트인데, 대신 ‘오늘, 세메론’이라는 단어를 씀으로 더 분명히 말씀한다.
계속해서 주님은 ‘그리고 우리의 그 죄들을 용서하소서 (아오리스트) 대게 우리가 우리에게 빚지고 있는 (현재진행형) 모든 이들을 용서하고 있습니다 (현재 진행형)’ 라고 하신다. 살다보면 서로가 마음을 상하게 하고 빚지는 것 처럼 죄와 실수를 저지를 때가 있는데, 그 때마다 ‘모든 이들’을 용서하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남을 용서하지 않으면 주님의 용서를 경험할 수 없고, 주님의 용서를 체험할 때 모든 이들을 용서할 수 있다. 용서는 쥔 것을 보내주는 것 (아삐에미) 이다.
주님은 ‘우리를 시험 안으로 인도하지 마소서, 하지만 악한 자로부터 구하소서’ 라고 맺으신다. 마태복음은 추가로 내용이 있지만 누가복음은 주님께서 산상수훈 중에 하신 말씀이 아니라 ‘제자 중에 하나가 여쭌’ 것에 대한 내용이기에 이 부분은 생략되었다.
아무튼 주기도문의 거의 모든 동사의 시제는 아오리스트로 믿음과 관계가 있는데, 현재에 이루어지지 않고 체험이 쉽지 않아도 믿음으로 구하며 취하며 누려야 하는 문제들이다. 하지만 그 중에 단 두개가 현재 진행형으로 되어 있는데, 바로 ‘오늘’ 당장 필요한 양식을 구하는 문제와 ‘용서’에 대한 문제다. 모든 기도 제목들이 중요하지만, 지금 현재 우리가 구하고 누리고 행해야 할 것은 기본적인 음식을 구하는 것과 용서하는 삶이다.
주님, 나의 마음에는 아직도 쥐고 있는 것들, 아직도 계산할 것이 남았다는 생각들이 있음을 봅니다. 어리석게 이것들을 쥐고 있지 말고 보내 주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관계 속에서 오늘 해야할 것은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들을 간과하시는 것 처럼, 우리들도 모든 이들에 대해 놓아 보내기를 원합니다. 오늘을 사는 것 이상의 것에 대해 욕심을 품지 말게 하소서. 오늘 쓸 것을 주심에 감사합니다. 용서와 감사가 넘치는 형제들의 삶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