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새인의 초청으로 주님은 식사하러 가셨는데 식사 전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이상히 여기자 주님은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39-40)’ 라고 말씀한다. 깨끗한 ‘잔과 대접의 겉’과 탐욕과 악독이 가득한 ‘너희 속’을 비교하시는데, 잔과 대접이 무언가를 담는 용기인 것 처럼, 사람도 무언가를 안에 담는 그릇임을 암시하신다. 로마서 9장 여러 구절에서는 ‘귀히 쓸 그릇, 천히 쓸 그릇’, ‘진노의 그릇’, ‘긍휼의 그릇’ 등을 말씀하는데, 24절에는 ‘이 그릇은 우리니’ 라고 하며 바로 우리가 무언가를 담는 그릇 혹은 도구가 됨을 말씀한다.
고후 4:7에는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라고 말씀하는데, 바로 질그릇 처럼 볼품없는 우리 안에 보배를 소유하고 있음을, 또 골 1:27에는 “..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고 기록하며 이 보배가 바로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임을 말씀한다. 그리스도 없이는 아무리 깨끗이 닦아도 질그릇에 불과하고 속은 더러운 것으로 가득차게 되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면 질그릇이라도 능력과 영광과 소망이 가득하다.
41절은 ‘그러나’로 시작하는데, 원어에서 보통 ‘그러나’는 ‘alla’라는 단어를 쓰지만 여기에는 ‘플렌’ 이라는 단어를 썼는데, 그 의미는 ‘더우기, 오히려, 그보다는, 아무튼’ 등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러나’로 번역하면 문맥상 매끄럽지 못하다. 한글킹제임스역은 ‘오히려’ 라고 번역했는데, 그것이 조금 나은 것 같다. 41절을 다시 원어에 맞춰 번역하자면, ‘오히려 그 안에 있는 것들로 너희는 구제하라. 그러면, 보아라, 모든 것이 너희들에게 깨끗하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구절이 쉽지 않은 이유는 ‘안에 있는 것들’이라고 번역한 말은 ‘에노타’ 라는 한 단어로 ‘안에 있다’라는 뜻의 동사지만 목적격으로 쓰였다. 동사이기에 시제가 있는데 현재형이다. 즉 현재 안에 있는 그 어떤 것으로 구제하라는 말씀인데, ‘구제하라’ 는 아오리스트 시제이다. 또 뒤에 ‘보아라’는 아오리스트, (깨끗함이) ‘있다’는 현재형이다.
이러한 시제로 미루어 보아 주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너희 속을 보아라, 무엇이든 있느냐? 그것으로 구제한다면 정말 깨끗하다. 하지만 정말 너희 속에 무엇 선한 것이 있느냐?’라고 말씀하는 것 같다. 주님 없는 인생은 질그릇 뿐 만이 아니라 악한 영 외에는 그 속에 있는 것이 없다. 그래서 현재 무엇을 해도 깨끗한 것이 있을 수도 나올 수도 없다.
남의 집에 식사하러 오셔서 주님은 42절부터 끝절까지 계속 ‘화 있을진저’ 라고 말씀한다. ‘음식이 맛있군요. 초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라고 빈 말 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폭로하신다. 어차피 주님이 그들 식사에 가고 싶어 가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주님을 초청해 놓고 시험하려 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율법교사들을 비판하시는데, 사실 ‘비판’이 아니라 그들의 진정한 상태를 폭로하신 것이다. 겉으로는 거룩해 보이고 모든 율법과 규율과 계명을 지키는 것 처럼 보이던,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범접할 수 없어 보이는 삶을 사는 것 같은 바리새인들이지만, 정작 그 내면은 지극히 종교적이고 이기적이며 본질에서는 완전히 떠난 이들이었다. 율법교사들 역시 지금으로 비교하자면 신학자들일텐데, 신학자들을 아예 무시할 수는 없지만 말씀을 실천하고 살아내기 위한 신학을 하는 이들이 있는 반면, 자신들의 학파의 상대적 우월성을 고집하기 위해 말씀을 ‘이용’하며 그 안에서 문자적인 말놀이에만 급급하다가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정작 본인은)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 이들로 전락하고, 서로의 신학 차이로 물고 뜯는 이들이 있다. 이런 이들은 복음을 바로 보지 못하고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박해하고 죽인다.
정말 화가 나는 것은 52절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는 말씀이다. 바리새인들에게는 외적 ‘거룩함’이 있고 율법교사들은 ‘지식의 열쇠’가 분명 있지만 결국 그들 자신들이 복음을 받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율법적 혹은 신학적 해석으로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또 그리스도께로 오는 이들도 막았다. 그런데 나 역시 나 때문에 실족한 이들도 많았을 것을 안다. 주님의 긍휼이 필요하다.
주님,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께서 내 안에 계시기를 원합니다. 그 아가페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기 원합니다 (엡 3:17). 내 천연적인 기질 속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주께서 내주하실 때 모든 것이 깨끗함을 믿습니다. 나의 죄성은 바리새인의 주목 받는 위치를 추구하고 그들의 ‘척’하는 것들을 따르며, 따지기 좋아하는 율법교사의 어떠함을 좋아하지만 그런 것들로부터 해방되어 오직 내주하시는 그리스도께 주목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