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절은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라고 시작한다.  ‘수만’이라는 단어는 ‘무리아스’라는 말인데, 이 단어의 복수를 써서 ‘무리아돈’이라고 누가는 기록한다.  이 단어는 신약에 9번 나오는데, 계시록 같은 곳에서는 문자 그대로 ‘만’으로 번역했지만, 그 외에는 ‘매우 많은’ 혹은 ‘헤아릴 수 없는’ 등으로 번역되었다.  누가는 왜 그냥 ‘많다’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만’이라는 의미의 ‘무리아돈’을 무리해서 썼을까?  ‘서로 밟힐 만큼’ 사람들이 많았음을 보여주기 위해 소위 ‘과장법’을 쓴 것이다.  이러한 문장에서는 이 ‘무리아스’를 써도 숫자 ‘만’으로 이해하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너무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이 ‘무리아스’를 ‘만’으로 해석하면 정말 무리다.  ㅎㅎ  재미있게도 순 우리 말 ‘무리’와 비슷하다.

 

이렇게 서로 밟힐만한 복잡한 가운데서도 주님은 1절부터 12절까지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먼저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시는데 ‘누룩’을 ‘외식’ 즉 위선 혹은 가식에 비유하신다.  누룩은 빵을 부드럽고 먹기 좋게 만들 때 필요한 것이지만, 누룩이 하는 일은 원래의 것보다 부풀리는 것인데, 아주 적은 양의 것을 매우 크게 보이도록 한다.  보통 식빵의 원래 반죽 사이즈는 주먹보다 작은데, 누룩이 그만큼 부풀린다.  즉 본질이나 생명이 없어도 있는 것 처럼, 많은 것 처럼 보이게 하는, ‘가식’ 혹은 ‘위선’이다.

 

이 위선이라는 단어 ‘후포크리시스’의 원래 의미는 ‘응답, 연기, 위선’ 등으로,  ‘나의 입장을 다른 이가 말한 것을 빌어 말하다 (아마도 앵무새 처럼), 무대에서 (대사를) 말하다, 가식적으로 행동하다’ 등을 의미하는 ‘후포크리노마이’가 어원인데, 이는 ‘옆, 아래’의 뜻인 ‘후포’와 ‘나누다, 택하다, 선호하다, 결정하다, 심판하다, 다스리다, 싸우다’ 등 정말이지 너무 많은 의미를 가진 ‘크리노’의 합성어이다.  즉 나의 것이 아닌, 내가 경험한 것이 아닌, 내가 소유한 것이 아닌 어떤 것을 나의 것 처럼, 내가 경험한 것 처럼, 내가 소유한 것 처럼 ‘척’하는 것이다.  .. 인간은 정말이지 ‘외식, 가식, 위선’ 투성이다.

 

진리나 복음의 면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이것은 신학교에 가서 배울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성령께서 빛 비추시고 눈을 열어 주셔야 볼 수 있고 경험하며 소유할 수 있는 문제이다.  신학교에 가서 도움은 좀 얻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어떤 경우 오히려 방해만 될 수도 있다.  (내가 자꾸 신학교에 대해 비판적인 것은 내가 신학을 했기 때문이고, 결론적으로 많은 좋지 못한 열매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제대로 된 신학은 필요하다.)  내가 신학을 했기 때문에 혹시라도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척하고 있진 않는가?  이 문제는 ‘주의’할 (1) 문제인데, ‘프로세코’라는 단어는 ‘(남의 상황에 대해) 비교 적용하다, 비추어 보다’라는 의미도 있다.  내가 혹시 외식하는 것은 아닌지 주님 앞에 점검 받아야 한다.  아니면 바리새인의 누룩을 그대로 답습한다. 

 

그래서 외식을 주의하고 이를 피하려면 주님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  4절부터 12절까지는 주님 혹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말씀하는데, 하나님만이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대상, 즉 경외의 대상이심을 분명히 하신다.  ‘지옥’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 ‘게헤나’로 골짜기를 의미하는 ‘게’와 ‘힌놈 (탄식)’의 합성어이다.  예루살렘 남쪽 골짜기 아래로 죽은 동물이나 죄인들을 던져서 불사르던 '힌놈의 골짜기'이다.  죽은 후에는 의식이 없을 거라 생각하지만, 영혼은 계속해서 존재하기에 이는 믿지 않는 자들이 불못에 던져질 것을 미리 보여주는 장소가 된다.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두려움은 무서워 떠는 면도 분명 있지만, ‘경외’를 의미하는데, 죄인으로서는 무서움만 있지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6절은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라고 말씀하신다.  참새가 한번 팔린 상태는 소망이 끊어진 상태이지만 그 하나라도 하나님은 잊지 않으신다.  참새까지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에 대해 우리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된’,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한’ 이들이다.  믿는 이들이 죽음에 넘겨져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잊지 않으시는, 많은 참새들 보다 더 귀한 이들이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라고 기록한 8절인데, 원어에서는 ‘나를’ 부분이 ‘내 안에서 en’로, 또 ‘그를’ 역시 ‘그 안에서’로 되어 있다.  주님을 시인하고 주님께 시인받는 문제는 따로 떨어진 상태에서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안에, 그가 내 안에 있을 때 가능하다.  ‘시인’이라는 단어는 ‘호모ㄹ로게오’로 ‘같은 말을 하다’라는 의미이다.  아무리 말을 맞추려 해도 '같은 말'이 되기 위해서는 ‘가식’으로는 불가능하고 서로의 ‘안에’ 있는 깊은 관계에서만 가능하다.

 

9절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의 ‘앞에서’는 ‘보는데서’의 의미이다.  사람들 보는데서 주님을 부인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사자들 보는데서 부인을 당한다.  ‘부인하다’는 ‘아르네오마이’인데, 부정접두사인 a와 ‘말하다’의 의미인 ‘레오’의 합성어이다.  즉 ‘말하지 않겠다, 무시하겠다’의 의미이다.  재미있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의 마 16:24 '부인'은 ‘아프아르네오마이’인데 같은 ‘부인’에 ‘아포’라는 접두사가 추가 되어, ‘포기’라는 의미가 되었다.  나 자신을 포기하며 매일 십자가를 지고 가지 않으면 주님 안에 있을 수도, 주님이 내 안에 계실 수도 없다.  결국 주님과 천사들 앞에서 부인당하고 무시당한다 ( 7:23).

 

주님의 사랑받는 친구되기 원합니다.  친구로서 외식을 주의하기 원합니다.  주님의 거룩한 말씀을 앵무새처럼 말만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하나됨으로 같은 말을 하기 원합니다.  지식으로 배워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주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해 깨닫고 주님과 함께 말할 수 있게 하소서.  내 안의 가식적인 것들, 밖의 외식들을 모두 부인합니다.  모두 포기하기 원합니다.  오늘도 십자가를 짐으로 하나 하나 더 포기하는 하루, 주님과 하나 되는 하루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