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한 나라를 세우시고 그 나라가 거룩한 공동체로 성장하기 바라셨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실패했는데, 그 실패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결국은 하나님을 떠나고 그에 따라 공동체 의식을 저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근본적으로 ‘영적 문제’이며 ‘영 안의 하나 (엡 4:3)’가 없었기 때문인데, 이 ‘영’ 혹은 ‘성령’이 없이는 인간적인 그 어떠한 방법도 참된 공동체를 이룰 수 없다. 그래서 정치적으로 가장 진보한 것으로 보였던 공산주의는 실패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왕국은 역시 민주주의나 자본주의일 수도 없는데, 지금 너무도 이 두 가지 정치 경제 시스템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에게는 복음이 말하는 하나님 왕국과 공동체를 이해하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역사적으로 복음적 공동체를 이루려는 시도는 꽤 있었지만 많은 경우 이단으로 빠지거나 혹은 중간에 사라져 버렸다. 생각해보면 참 믿음을 어느 때인가 잃어버리고, 따라서 소망도 잃고, 결국 인내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물론 지금 소위 말하는 많은 기성교회도 분명 복음이 있고 하나님의 교회이며 구원이 있고, 계시록에서는 이러한 기독교의 모습 역시 교회의 한 모습임을 볼 수 있지만, 진정한 공동체의 모습이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먹고 입는 문제에 대해서 걱정하지 말라고 하시는데, 당시에는 기본적으로 ‘먹고 사는’ 문제가 깨나 심각한 문제였지만, 요즘은 자본주의 구조 속에서 ‘상대적’으로 잘 먹고 잘 입어 뽐내는 것이 관심 주제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하신 것이 ‘더 잘 먹고 잘 살고 성공하는’ 문제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24절에는 ‘까마귀’를 언급하시는데, 이 단어 ‘코락스’는 신약에 여기 단 한번 등장하는 단어다. 다른 성경에는 그냥 ‘새’로 나오고 역시 ‘너희는 새들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에서도 ‘새’라는 단어를 쓰지만, 누가는 일부러 이 ‘코락스’를 언급하는데, 그 어원은 ‘코레누미’로 추정된다고 하며, 그 의미는 ‘만족하다’ 이다. 즉 인간의 삶이 아무리 풍족해도 ‘만족’이 없다면 헛것이라는 말씀이다. 부자는 상대적으로 부유한 것에 대해 우월감을 느끼며 자신은 남들과는 다른 부류라고 여긴다. 하지만 정말 그 부가 그에게 참된 만족을 주는가에 대해서는 단언할 수 없다. 그 어떤 부자도 ‘절대적’인 부자라는 것은 없기 때문에, 그가 느끼는 만족 역시 상대적인 만족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참된 만족은 나 혼자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느끼는 것이어야 한다. 주님은 29-30절에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고 말씀하며 결국 우리가 추구하고 있어야 할(현재 진행형) 것은 ‘하나님의 왕국’임을 말씀한다. 그러면 ‘이들 모두가 너희들에게 더하여질(미래 수동태) 것이다’라고 말씀한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 모두’는 복수인데, 동사 ‘더하여질 것이다’는 단수형 동사이다. 비슷한 구절인 마 6:33 역시 이 부분은 단수형 동사로 되어있다.
보통 이 구절에 대한 이해는 ‘하나님의 왕국을 추구하고 있으면 우리 먹고 입는 것들과 그 외 모든 필요한 것들이 더하여 질 것이다’라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왕국’이 주체가 아니라 ‘이 모든 것들’이 주체와 목적이 되어 버린다. 누가나 마태는 주님께서는 하시는 말씀의 주제가 우리가 쓸 것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왕국’임을 분명히 한다.
그래서 주님은 다시 32절에 ‘적은 (미세한) (양)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왕국을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고 말씀하며 그 공동체의 실행에 대해 33절에 보여주신다. 여기에는 ‘팔아라’ ‘구제하라’ ‘만들라’의 세가지 명령이 있고, 이들은 ‘하늘들 안의 다함없는 (실패하지 않는) 보화’로 연결된다. 이러한 세가지 ‘투자’가 실패하지 않는 이유는 ‘하늘들 안’에 있기에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엄밀히 말해 우리가 무언가를 공간적인 ‘하늘’로 보낼 수도 없고 그 하늘에 보화가 있다고 생각할 수도 없다. 이 ‘하늘들’ 역시 ‘하나님의 왕국’과 연결되는데, ‘하나님의 왕국’은 복음서에서 ‘하늘들의 왕국(천국)’과 함께 쓰였기 때문이다. (해석에 따라 이 둘을 다르게 이해하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같은 의미로 본다) 그렇기 때문에 위의 ‘팔아라’ ‘구제하라’ ‘만들라’의 세가지 명령은 ‘하나님의 왕국’과 관계가 있고, 그것의 목적과 실행 지경은 바로 ‘공동체’에 있다. 믿음의 공동체를 위해 ‘팔아야 (돈을 주고 팔거나 혹은 물물교환)’하고 필요에 따라 ‘구제하’고 또한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어야 한다.
이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이 재미있는데, ‘배낭’의 원어는 ‘발란티온’으로 ‘돈지갑’ 혹은 ‘돈가방’을 의미하는데, 그 어원은 ‘발로’로 생각되며, ‘(별 생각없이) 던지다, 붓다, 버리다’ 등의 뜻이다. 언제든 필요에 따라 누구에게든 돈이나 재물을 생각없이 던지듯 줄 수 있는 그러한 가방이 필요한데, 더우기 ‘낡아지지 아니하는’ 즉 항상 준비가 되어있는 그런 가방을 ‘만들’어야 한다. 공동체로서 이러한 가방을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왕국의 풍성함을 경험하게 한다.
그런데 이러한 것이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자본주의적 입장에서는 결코 가능하게 보이지도 않고 역사적으로 이단의 실패 예들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 말씀 자체를 보며 복음에 대해 더 추구하고 묵상하며 고민할 필요가 있다.
공동체를 떠나서는 복음을 말할 수 없다. 그래서 교회 생활은 반드시 필요하다.
주님, 주님의 몸된 교회가 진정한 공동체로서 서로가 섞이며 세워질 수 있는 하나님의 왕국이 되기 원합니다.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우리에게 더욱 믿음 주소서. 우리의 현실을 통해 추구하는 것이 더 잘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정말 주께서 원하시는 공동체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믿음의 형제들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