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에는 '청기지'라는 말이 등장한다. '집사'라는 말을 쓸 수도 있지만 '청지기'라는 단어가 쓰였는데, 35-47절은 주님과 종의 관계에 대해 말씀하기에 '(37)' 혹은 '청지기'가 된다. 먼저 믿는 이들로서 종된 모습은 주님을 기다리는 것에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종들은 문단속을 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밤에는 문을 걸어 잠그는데, 주님께서 오실 때 언제든 열어드릴 수 있게 준비하는 자들이다. 교회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진리적인 면에서는 타협할 수 없이 문을 걸어 잠궈야 한다. 특히 때가 밤일 때는 문단속을 철저히 해야 한다. 하지만 주님께서 오시면 그 종된 위치에서 주님의 주권 아래 문을 활짝 열어 드려야 한다. 이럴 때 주인이 오히려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 들'것이라고 말씀한다. 종의 일을 잘 했을때 주님은 종들을 주인의 위치에 놓으실 것이다.

42절에는 이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하시는데, 주님의 종들은 주님에 대해서는 종들이지만 세상에서는 주님의 대사들이다. 그래서 주님의 모든 것에 대한 권위를 부여받는다. 그래서 '청지기'라고 불린다. 41절에서 베드로는 주님의 비유가 자신들에게만 해당하는지 아니면 다른 모든 이들에게도 적용되는지 물었지만, 그에 대한 대답은 하지 않으시고 42절을 말씀하시는데, ''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청지기'직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청지기직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그 ''가 올 수 없다. 이것은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 8:19)' 때인데,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남'이 바로 '청지기'가 올바로 그 책임을 다하는 것과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개정역은 42절을 '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고 번역했는데, 킹제임스흠정역은 '주께서 이르시되, 그런즉 자기 주인으로부터 그의 집안사람들을 넘겨받아 다스리며 제 때에 그들에게 그들 몫의 양식을 나누어 줄 신실하고 지혜로운 청지기가 누구냐?' 라고 번역했다. 거의 비슷하지만 원어에는 중요한 단어로 '오이코노모스 (청지기)' '쁘로니모스 (지혜롭다)' '카타스테세이 (맡기다, 위임하다, 다스리는 자로 삼다)' '떼라페이아스 (먹이다, 치유하다, 영어 therapy의 어원)' '카이로스 ()' '씨토메트리온 (양식)' 등이 등장한다.

원어를 직역하자면, '그런데 주님은 말씀하시다 그런즉 누가 믿음직한 청지기 그리고 지혜로운 ()이냐 주인이 그를 그의 카타스테세이 (집을 다스리는) 이로 위임할 것이다 때 안에 양식을 주는' 정도가 될 것인데, 우선 주님께서는 '믿음직하고 지혜로운' 자를 찾으신다. '지혜롭다'는 보통 '소피아'를 쓰지만 여기에는 '쁘로니모스'라는 단어를 썼는데, '지혜롭다, 현명하다'의 의미이고 그 어원은 '쁘린'으로 '생각' 혹은 '심장의 판막'을 의미한다. 재미있는 것은 개정역에서는 '청지기가 되어'라고 되어있지만, 원어는 '이다'이다. 즉 이것은 청지기가 '되는' 문제가 아니라 이미 믿음직하고 지혜로운 자를 찾으시며 초청하는 것이고 또한 이미 청지기인 이들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청지기는 우선 믿음직한 혹은 신실한 자들이며 또한 지혜로운 자인데, 이 지혜로움은 이미 지혜로운 경지를 얻는 사람이다. 지혜를 배워서 그 생각이 바로 선 자이며, 심장의 판막처럼 이미 그 기능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이 청지기이다.

그런데 '청지기'라는 단어가 매우 의미심장하다. 우리 말은 관청 ''자를 썼는데, 그 의미가 주인의 모든 것을 위임받고 부여받은 자를 뜻한다. 그래서 주인이 없을 때 청지기가 모든 것을 도맡아 한다. 그렇기에 그는 우선 신실하고 또한 지혜로운 자라야 하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원어 '오이코노모스'는 남성명사인데, 같은 단어지만 여성명사로 쓰인 단어 '오이코노미아'는 에베소서 1장에 '경륜'으로 번역되었다. 이 둘은 사실 같은 단어지만 성만 다르다. 이들은 '오이코스 ()' '노모스 ()'의 합성어인데, 쉽게 말해 '집안 행정'이고 영어에서는 'stewardship'혹은 'dispensation'으로 번역되었다. 즉 이 청지기가 하는 일은 가정을 다스리며 필요한 것들을 나눠주는 것이다. 가정을 다스리는 것은 다시 말해 나눠주는 것인데, ''에 따라 '양식'을 나누어준다.

''는 단수로 되어 있다. 한번 가버린 시간은 오지 않는다. 그래서 각 때마다 나눔이 필요하다. 또한 '양식'을 나누어 주는데, 이 단어 '씨토메트리온'은 신약에 여기 단 한번 나오는 단어로 곡물 낱알의 의미인 '씨토스' '수량 measure'을 의미하는 '메트론'의 합성어이다. ''마다 각 사람이 '필요한 양'의 양식을 분배하는 것이다. 이것은 주일 '대예배'에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설교와는 차이가 있다. (물론 같은 설교를 들어도 그 받는 것이 모두 다를 수 있지만) 각 사람이 처한 상황과 그 믿음의 분량에 맞게 섬기는 것이다.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미래형) 그 종은 복이 있'는데(43), 이것은 지속해서 그 일을 해야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 종은 신실하다. 결국 이러한 신실한 청지기에 대해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고 약속하신다 (44). '맡다' 42절의 '카타스테세이'와 동일한 단어인데, 이제까지는 청지기로서 '떼라페이아스 (먹이다, 치유하다)'가 맡겨졌지만, 이 나눠주고 먹이며 치유하는 일을 신실히 행한 이들에게는 후에 주인의 모든 소유가 맡겨진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청지기들 중에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남녀 종들을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는 신실하지 못하게 변질된 자들이 있다. '남녀 종들'이라고 번역된 구절은 원어에는 '소년들과 소녀들'이다. 자신이 섬겨야 하는 가족들을 때린다. 이 구절의 모든 동사 즉 '때리다, 먹다, 마시다, 취하다'는 모두 현재 진행형인데, 신실한 청지기인지 아닌지는 지금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언어나 행동으로 폭력을 일삼아 두렵게 하며 더우기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권속들을 자신의 종들로 삼는 이들이다.

이들은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하지 아니한 자의 받는 벌에 처하'게 되는데, '엄히 때리다'는 말은 '디코토메세이'라는 말로 몸을 둘로 쪼갠다는 의미이다. 그냥 때리는 것이 아니라 아예 박살을 (!) 낼 것이라는 말씀이다. , 주님은 은혜로우신 분이 아니었나? 이 청지기의 위치는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더우기 '신실하지 않다'는 말은 '믿지 않는'이라는 의미인데, 21:8에는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라고 동일한 단어가 쓰이며 이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임을 말씀한다. 청지기 같아 보이고 그러한 일을 하며 그러한 권위를 받은 이들 중에 맡은 바 그 책임을 다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오히려 믿지 않는 불신자들과 다름이 없는 벌이 내린다. 영벌이다. 주님 앞에서는 청지기나 종이나 모두 '둘로스' 노예이다.

그래서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고 말씀한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하나 의문이 생긴다. 만일 '아는 것'과 그에 대한 책임이 비례한다면 누가 알려고 하겠는가? 될 수 있으면 많이 맞지 않으려고 일부러 알려 하지 않을 것 아닌가? 그런데 이것은 주님과 상관없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주님의 종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주의 종으로서 '주인의 뜻'을 모를 수 없지만, '아는 것'만이 종의 자격이 아니라는 말씀같다. 주의 종으로 섬기려면 기본적인 주님의 뜻은 분명히 알아야 하겠지만 많은 것을 알지 못할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아는 것' '많이 받은 것' 그리고 '많은 요구'는 비례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소위 '능력의 종'은 그에 대한 요구도 당연히 많아진다.

주님, 청지기는 '되는' 문제가 아님을 감사합니다. 많은 때 실수하고 넘어지기 때문에 믿음직하지 못함을 고백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저희들을 충성스럽게 여기셔서 일을 맡기심을 감사합니다 (딤전 1:12). 이 영광스러운 청지기직은 또한 두려운 것임을 봅니다. 내가 섬겨야 하는 주님의 권속들에 대해 거룩한 부담을 주시고 그에 따른 능력이 되소서. 주님께 먼저 양식을 받음으로 그 양식을 나누기 원합니다. 많이 알게 하심은 많이 행하고 준비하며 섬기기 위한 것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