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말씀은 진정한 화합을 위한 분열을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주시는 화합과 화평은 인간적인 방법으로 연합을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한 것에서 떠남으로, 거룩하지 못한 것에서 갈림으로 영 안에 하나되게 하신 것을 지키는 것이다. 섞이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분별과 기준없이 마냥 섞여 버린다면 바닷물이 해안을 침범해 땅을 덮는 쯔나미 같이 되어 버려서 결국은 멸망에 이르게 한다.
그래서 가족은 중요한 것이지만 참된 가족은 육정의 결과로 이루어진 모임을 넘어 믿음에 의한 공동체적 가족이 영원까지 함께 갈 가족이 된다. (그래서 성경적으로 이혼이 가능한 이유 중 하나가 신앙적 갈등이다. 물론 이를 빌미 삼아 이혼할 수 없고 배우자의 신앙을 위해 될 수 있으면 갈리지 말라고 권하지만, 고전 7:15에는 신앙 문제로 믿지 않는 배우자가 갈리기를 원하면 이혼할 수 있음을 말한다) 어제 12장 54-56 또 마지막 절까지는 분쟁에 대한 말씀에 이어 말세를 분별함에 대해 언급하시는데, 57-59절은 그냥 보기에는 처세를 말씀하는 것 같지만 오늘 13장으로 자연히 이어지면서 '분쟁'과 '말세' 그리고 이에 대한 회개를 촉구하신다.
1절은 '그 때 마침'이라고 시작하며 12장 후반부에 대한 내용과 연관이 있음을 암시한다. 말세에 대한 말씀과 더불어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12:58)' 즉 나를 '고발하는 자'는 마귀인데, 법관에 갈 때가 이를 것이고 이는 주님 앞에 심판 받는 그 날이다. 59절은 '마지막 렙돈을 지불할 때까지 옥에서 나올 수 없을 것'을 말씀하는데, 이 렙돈은 헬라 문화권에서 가장 작은 액수의 동전이고 '옥'은 지옥 (벧전 3:19, 계 18:2 등)과 같은 단어다. 물론 자기 소유의 마지막 돈까지 탈탈 털리고 나면 지옥에서 구원받아 나올 수 있다는 말씀은 아니다. 마지막 렙돈이 털리는 것은 사람을 죽을 때까지 쥐어짜는 것이다. 그래서 가난한 과부에게도 '두 렙돈 (막 12:42, 눅 21:2)'은 있었고 그는 그 모두를 연보했다.
그래서 드디어 오늘 구절에는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에 대한 예, 열매를 내지 않는 포도원 등을 말씀하는데, 이 모든 예들이 말세와 심판에 관계가 있다.
기억하기로는 빌라도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 에돔 사람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행했는데, 문장상으로는 정확히 무엇을 했는지 모르지만 그들의 제물에 그들의 피를 섞은 것이다. 피는 죽음, 그리고 이에 따른 용서, 그리고 궁극적으로 생명을 의미하는데, 그들의 '제물'에 피가 섞였다. 이것은 매우 부정하고 영적인 형벌로 보이는 것이다. 일반적인 인식이라면 그냥 토속인들의 문화를 잘 모르는 이방 주권자가 실수를 한 것으로 이해하겠지만, 주님은 이를 '회개'와 연관시키신다. 회개하지 않으면 '망하리라 (3, 5절)'고 말씀하는데, 이 '망함'은 요 3:16절의 '멸망'과 동일한 단어이다.
피의 제물은 갈릴리 지역의 사건이었지만 예루살렘에서는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서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있다. 이들의 죽음은 소위 '인재' 때문에 죄도 없는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임당한 것으로 생각될 수 있지만, 역시 주님은 '회개'를 말씀한다. 여기에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주님 말씀처럼 그들만이 특별히 악하거나 죄가 많아서 그렇게 죽은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말씀은 '말세'를 보여준다. 각 사람은 언젠가는 죽을 것이고 그 후에는 심판이 있을 것인데, 회개함이 없으면 '멸망'이 있다. 갑자기 세월호 사건이 생각난다. 여러 원인을 찾고 이에 따른 책임을 묻거나 보상을 요구하고, 또 '인재'로 여기는 것은 상식적으로는 당연한 것이지만, 믿는 이들에게는 이 가슴 아픈 사건에 대해 영적인 시각이 필요하다.
아마 주님께서 세월호 사건을 두고 피의 제물이나 망대 사건 처럼 말씀하셨다면 욕먹으셨을지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세상의 삶이 그리 길지 않다는 점이다. 언젠가는 모두 죽는다. 어려서 '꽃도 피지' 못하고 죽임을 당한 것, 그리고 이를 야기시킨 인재적 원인에 대해서는 정말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겠지만 여기서 배우는 단 한가지는 이미 죽은 이들에 대해서는 그 아무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이고, 우리 모두 역시 언젠가는 죽는다는 점이다. 그런데 회개하지 않으면 진정한 사망이 있을 것인데, 주님은 지금 그것을 말씀하고 계신다!
회개는 헬라어로 '메타노에오' 즉 '생각을 바꾸다'라는 뜻인데, 문자적으로는 생각을 바꾸는 것이 우선적이다. 진정 생각을 바꾸면 가치관이 바뀌고 세계관이 바뀐다. 그래서 행동도 자연히 바뀌고 이에 따른 삶의 태도나 결과도 바뀌어야 한다. 그런데 생각이 바뀌는 것이 쉬운 것인가? 사실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주님은 회개하고 있지 않으면' 이라고 말씀한다. 즉 회개는 현재 진행형이다. 우리의 생각은 우리의 기질과 주위 환경을 통해 항상 자동적으로 사망으로 향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생각을 바꾸는' 회개 훈련을 해야한다. 내 자신을 포기한다고 이러한 노력까지 포기할 수는 없다. 주님께서 하라고 하신 것을 포기하면 안된다. 나의 생각은 회개가 필요하고 훈련이 따라야 한다.
그래서 주님은 6절 포도원의 비유를 말씀한다. 보통 내용이 바뀔 때 '카이'를 쓰지만, 6절에는 바로 '이 비유'를 말씀하시며 '회개'에 대한 설명을 계속하신다. 즉 참 회개에는 그 열매가 따라야 함(눅 3:8)을 말씀한다. 포도원 주인은 이미 삼년을 허비해서 찍어버리려고 했지만 포도원지기는 이번 한 해만 더 기회를 달라고 부탁한다. '두루 파고 거름을 주'는 노력을 할 것인데, 그래도 열매가 없으면 그 때 찍어 버리라고 간청한다. 금년까지 기다려 주시는 것이 은혜다. 다시 말해 세월호 사건은 정말 가슴 아픈 일이고 법적으로 그 원인을 반드시 규명하고 연관된 책임자들에 대해 모두 응당한 대가를 치르게 해야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게 되지 않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믿는 자들은 우선 나를 돌아보아 내가 그 어떤 모습의 세월호에서 죽음을 당하지 않고 아직까지 또 금년까지 기회가 주어진 것에 대해 감사하며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주님, 평범한 나날들이 주님의 안보하심과 회개를 위한 은혜였네요. 날이 평안하다고 안이해지지 않고 생각을 훈련하기 원합니다. 고난이 이익이 됩니다. '두루 파고 거름을 주는' 스트레스가 조금은 필요합니다. 주님의 생명이 풍성해서 그 안에 거함으로 우리 삶 가운데 주께서 기뻐하시는 열매를 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