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장에는 ‘청하다’는 말이 11번이나 나오는데, 어제 말씀에서 주님은 청함 받음이 청하신 이의 은혜임을 말씀한다.  ‘청하다’는 원어로 ‘칼레오’인데, ‘부르다’의 의미이다.  13절에는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이에 대해 15절에 ‘함께 먹는 사람 중의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라고 말하자, 다시 한번 말씀하시는 것이 오늘 말씀의 내용이다.  주님은 마치 ‘네가 그런 말을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가 누군지는 잘 모르는 것 같다’ 라고 말씀하시는 듯 하다.

 

초청하는 비유를 말씀하시며 소위 ‘제대로 된’ 사람들은 부름을 받았지만 하나같이 핑계를 대며 잔치에 참여하지 않았다.  16절은 주인이 미리 불렀고, 17절은 ‘저녁 시간 (원어)’에 종을 보내어 다시 초청하지만 그들은 지극히 정상적인 삶의 이유를 들어 하나같이 거절하다.  그런데 이러한 지극히 정상적인 삶의 이유들은 그 ‘때’와 맞지 않는다.  ‘저녁 시간’인데 ‘밭에 나가 본다’고, ‘소 다섯 겨리를 시험한다’고, 또 ‘장가 들었다’고 거절한다.  주인이 노한 이유다 (21).

 

그래서 주인은 이제 못난 사람들을 부른다.  이들은 원래 부름 받은 이들도 아니고 저녁 시간에 맞닥뜨려 부름을 받지만 잔치에 초대되고 많이 참여한다.  이들은 집도 없이 ‘시내의 거리와 골목’에서 돌아다니는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이다 (21).  15절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라고 말한 사람은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내가 이런 사람이라고?)

 

그런데 이러한 자들이 채워져도 아직도 빈 공간이 남았다.  21절의 ‘거리와 골목’으로는 부족해 ‘길과 산울타리 밖으로 (23)’까지 샅샅이 다니며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명하신다.  이 ‘길, 호도스’는 ‘한적한 도시 밖 여행자의 길’이라는 의미가 있고, ‘산울타리, 쁘라그모스’는 지경을 나누는 경계다.  즉 마을 밖으로 ‘나가라, 엑셀떼’ 명하신다.  못난 이들, 이방인들이다.  그리고 그들을 ‘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 신다.  고후 5:14에도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라고 ‘강권’이라는 말을 쓰는데 이는 ‘쑤네코’로 ‘서로 굳게 잡다’를 의미하지만, 여기서의 ‘강권’은 ‘아나그카조’로 ‘물리적인 방법이나 그 외 여러 가지 방법을 쓰더라도 속히’ 라는 의미가 있다.  잃어버린 한 영혼을 사랑하시는 주님이지만, 여기에서는 한 영혼 보다는 ‘빈 공간’에 더 비중이 있다.  물론 같은 것이지만 이는 주님의 집에 거할 곳은 많을지라도 그 자리에는 한계가 있음을, 즉 이방인의 때와 수를 보여준다 ( 6:11, 21:24).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명령을 수행하는 ‘종’은 한명이다.  계속해서 단수로 나온다.  이 많은 사람들을 초청하고 저녁 시간이 임박해서 큰 거리와 골목, 그리고 산길 및 울타리로 나가서 모든 이들을 부르는 엄청난 일에는 많은 종들이 필요한데, 단 한 명의 종에게 명하신다.  그래서 우선 이 종은 기름 부음 받은 그리스도이시다.  ‘집 주인’이신 아버지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부르신다.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고 이 아버지의 집 빈공간을 채우는 사명은 head servant이신 주님으로부터 주의 종들에게 맡겨졌는데, 각자 한 명에게 맡겨진 것 처럼 열심히 사명을 감당해야 함을 보여주신다.

 

주님, 주께서 로고스이신 것은 저에게 말씀하며 교제하기 원하시기 때문임을 압니다.  내가 부름받은 것은 잘나서가 아니라 못났기 때문임을 깨닫습니다.  이제 주님의 생명 안에 거듭남으로 정말 '잘난' 사람되고, 못난 사람들을 부르기 위해 보냄받음을 알게 하소서.  그렇습니다.  못난 사람을 부르기 위해 저는 부름받았고 또한 보냄받습니다.  주의 말씀이 저에게 생명되소서.  저를 부르셨으니 또한 보내소서.  부름받고 보냄받는 한 종으로 주님을 닮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