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관계에 대한 재정리가 필요하다. 천연적이고 혈통적인 관계가 주님과의 관계보다 먼저거나 아니면 바로 정립이 되지 못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지 못한다 (엡 1:10). 주님을 따르는데 있어 여러 가지 악한 것들은 물론이지만 선해 보이는 것들 즉 부모를 공경하고 형제 자매를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인성이나 도덕적 교육에 바탕을 두었다면 이러한 선한 것들 역시 한번은 죽음과 부활을 통과해야 한다. 지난 말씀에서 가족 안에서의 분쟁을 말씀하셨는데, 주님을 온전히 믿는 것에는 핍박이 따른다.
26절은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함을 말씀하는데, '오다' '미워하다' '능하다' '되다' 모든 동사가 현재형이다. 먼저 주님께로 '오고 있는' 사람인데, 이 사람이 주님께로 오면서 인간적인 관계에 얽힌 상태로 오면 온전히 제자가 되지 못한다. 그래서 딤후 2:4에는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한다. '미워하다'는 '미쎄오'라는 단어로 성경 거의 모든 구절에서는 부정적으로 쓰인, 말 그대로 '미워하다'라는 의미인데, 특히 능동태로 쓰였다. 주님 안에서 관계를 재정비하려면 그냥 미워하라는 것도 시험들 말씀 같지만 아예 적극적으로 미워하라고 말씀하는데, 이러한 적극적인 미워함에 순종하다보면 내가 정말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이 없기 때문에 교회 세습이 있다)
많은 때 '그리스도인'과 '제자'에 차이가 있는가 고민하게 되는데, 행 6:1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라는 구절을 근거로 주님을 믿는 사람은 당연히 제자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물론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 제자가 되어야 하지만 오늘 말씀을 근거로 보면 그 둘 사이에는 차이가 있음을 본다. 그리스도인은 모두 제자였으면 좋겠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못한데, 주님을 따르는 데에는 철저함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모든 관계를 재정립하는 것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결국은 자기 자신의 목숨 즉 자아에 대한 처리까지 요구되는데, 27절에는 그것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는 것이라 말씀한다.
28-32절은 그 내용이 마치 내가 제자가 될 수 있을까 고민하고 계산해 보라는 말씀같이 들리지만, 사실 내가 고민하고 계산함으로 제자가 될 수는 없다. 33절은 '그러므로'라고 시작하고 또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는 문제를 말씀하며 나의 어떤 소유와 능력을 바탕으로 계산하라는 것 보다는 내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소유에 대해서도 재정립을 해야함을 말씀한다. 소금이 자신을 녹여 맛을 내는 것 처럼 내가 완전히 녹지 않는다면 짜게할 수 없고, 내가 계산하고 헤아리는 것을 넘어 모든 것을 내려놓음이 없이는 주님의 제자로 살 수 없다.
주님,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어떤 타이틀이 아니라 삶임을 봅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 내 천연적인 여러 관계나 이해들이 재정립되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 필요하고, 더우기 실질적으로 우리를 옭아 매는 소유들에 대해 나의 것이 아님을 선포하고 인정해야 함을 배웁니다. 이러한 것들은 불가능한 것이 아님을 믿습니다. 이러한 삶을 사는 것이 오늘의 일임을 깨닫게 하소서. 인간적인 미워함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나와 얽혀있는 관계들을 새롭게 보게 하시고, 온전히 주님을 먼저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함을 배우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