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은 양의 비유에서 등장하는 이 양은 ‘어린 양’이 아니라 ‘잃은 양’이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이라는 이사야 53:6 말씀처럼 양이 길을 잃는 것은 어릴 때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목자이신 주님을 떠나 그릇 행하여 자기 길을 고집할 때 길을 잃는다. ‘잃은’ 이라는 말 ‘아폴루미’는 ‘멸망’이라는 뜻도 있다 (요 3:16). 멸망이 단지 지옥 혹은 불못으로 떨어진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주님을 떠나 길을 잃으면 그것이 멸망이다. 그런데 이 잃은 양의 주인은 찾아내기까지 찾다가 찾으면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기뻐하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고 말한다.
주님께서는 ‘하늘에서는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고 말씀하는데, 엄밀히 말해 이 잃은 양은 회개한 양이 아니라 길을 잃고 헤매는 상태에서 그 주인이 찾아 구해준 것이다. 그래서 은혜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 힘도 없고 길을 잃은 상태인지도 모를 수 있음을 아신다. 그래서 친히 찾으신다.
드라크마의 비유 역시 그 주인인 여자가 잃은 드라크마 하나를 다시 찾는 내용인데, 이 생명이 없는 동전 드라크마가 회개 할 수는 없다. 잃은 양이나 분실된 동전 모두 그 주인이 분실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사실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지 않도록 충분히 막으실 수 있었지만 그냥 두셨다. 이에 대해 하나님을 탓할 수 없다. 이 모든 것이 주님께서 친히 오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을 통해 은혜로 결말 짓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은혜는 ‘기쁨’으로 연결된다.
15장에는 ‘기뻐하다, 카이로’와 연관된 단어가 계속 등장하는데, 5, 6, 7, 9, 10 그리고 마지막 32절에 나온다. (물론 '즐겁다'라는 단어도 계속 나온다.) 그런데 이 ‘카이로’는 ‘은혜, 카리스’의 어원이다. 그래서 ‘은혜’라는 말은 없지만 그 어원인 ‘카이로’가 이어지고, ‘카이로’로 결말짓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의 비유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씀하는 것으로 들린다.
그런데 오늘 말씀 소위 ‘탕자의 비유’에서는 비로서 ‘회개’가 언급된다. 여기에는 탕자의 ‘스스로 돌이킴 (17절)’이 있다. 하지만 원어에는 '그 자신 안으로 왔다' 즉 자신의 처지를 깨달은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탕자의 '회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기다림’이고 다시 맞아 주시는 은혜다. 탕자의 비유에서 방탕한 삶에서 회개하는 내용이 부각되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그러한 내용은 단지 12-21절까지다. 22-24절은 아버지께서 다시 둘째 아들을 회복시키시는 내용, 그리고 25-30절은 어처구니 없게도 첫째 아들의 불평이 이어지는 내용, 그리고 31-32절은 다시 아버지의 말씀이다.
‘구령 운동’ 혹은 ‘선교’나 ‘전도’에서 ‘회개’가 분명 중요하지만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은혜를 아는 것이다. 회개함으로 ‘교인’이 되거나 교세 확장이 목적이 아니라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한데, 계속 ‘아버지 집’에 거했던 첫째는 어처구니 없이 정작 은혜를 경험하지도 누리지도 못한다. 물론 은혜를 누리기 위해 죄에 거할 수는 없지만 (롬 6:1) 첫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않’을 때 탕자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춘’ 아버지는 다시 그 은혜를 발동하여 친히 ‘나와서 권’하신다 (28절).
주님, 주님의 은혜는 우리로 회개하게 하십니다. 아버지의 기다리심은 우리로 다시 돌아오게 하심을 깨닫습니다. 은혜임을 고백합니다. 이 은혜가 우리 가운데 기쁨으로 분출되기 원합니다. 서로간에 기뻐하며, 아버지와 함께 기뻐하기 원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기쁨이십니다. 여호와를 아는 것이 우리에게 은혜이며 기쁨이며 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