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절은 ‘그런데 돈을 사랑하는 바리새인들도 이 모든 것을 듣고 그를 비웃었다’ 라고 기록한다. ‘비웃다’는 ‘에크무크테리조’인데 ‘밖으로’를 의미하는 ‘에크’와 ‘코를 들다’의 의미인 ‘무크테리조’의 합성어이다. 쉽게 말해 ‘콧방귀를 뀌었다’ 정도 되겠다. 바리새인들은 왜 재물에 대한 주님의 말씀에 콧방귀를 뀌었을까? 그들에게는 전혀 '현실적'으로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들 마음 속에는 ‘우리가 바리새인의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돈이 드는지 모르나본데? 어이, 젊은 양반, 현실은 그렇지가 않아’ 라고 말했을 것이다.
‘돈을 사랑하는’은 ‘돈사랑’의 ‘삘아르구로이’와 ‘하다’의 ‘후파아르콘테스’ 두 단어인데, ‘후파아르콘테스’는 ‘후파 (위)’ + ‘아르코마이 (처음으로, 시작하다)’의 합성어이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많이 쓰여서 아마도 누가의 말버릇인지도 모르겠다. 보통 ‘~이다, 있다, 하다’ 등으로 번역되었지만 아마도 ‘무엇보다 ~이다, 하다’ 등을 의미하는 것 같다. 즉 우선순위다.
바리새인의 이 모습은 나의 모습이다. 현실과 동떨어진 말씀같이 들리는 것에 대해서는 콧방귀가 나오며 ‘한번 해봐, 그게 되나’ 라고 속으로 비판한다. 선교나 여러 프로그램 들에 대해서도 일단 예산이 나오지 않으면 ‘예산 없이 일을 어떻게 진행해?’ 라는 불만이 나온다. 교회 운영이나 전도 혹은 선교를 돈으로 하는 것으로 배우기 때문이다. 물론 재정은 필요하지만 무엇이든 ‘돈을 사랑하고' (먼저) 돈으로 ‘시작하’려는 것은 바리새인의 모습이다. 하나님보다 현실을 본다.
주님은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하는 (합리화시키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너희 마음들을 알고 계시니 사람들 안에 높음은 하나님 목전에 가증함이다’ 라고 말씀한다. 재물 문제에 있어서 현실 운운하며 합리화하려 하지만, 결국 그것은 먼저 마음의 문제다. 재물을 가지고 사람들 앞에 잘난 척 있는 척 높은 척 나아가서는 거룩한 척 복받은 척 하려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가증한 것이다. 이에 대해 부자와 거지 나사로를 비교하며 이 문제는 사람들 앞에 아니라 하나님 앞의 문제임을 말씀한다.
19절에는 1절과 마찬가지로 다시 한번 ‘부자’가 등장하는데, 1절의 부자가 자신의 재물이 낭비되는 것에 대해서 관대한 사람이었다면, 이 19절의 부자는 소위 ‘자린고비’로서 자기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거지 나사로를 대하는 것 외에는 그 재물을 다른 이들에게는 결코 ‘허투루’ 쓰는 법이 없는 사람이다. 원어로 ‘그런데 어떤 부한 사람이 있었는데 보라색과 (이집트산) 면으로 옷을 두르고 날을 따라 호화롭게 즐겼다’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호화롭다’는 ‘비추다’ 혹은 ‘램프’를 의미하는 ‘람프로오스’에서 왔다. 그의 삶은 빛나는 삶이었다. 그에 비해 거지 나사로는 현실적으로는 정말 아무 의미나 소망이 없는, 더우기 그의 몸도 온통 피부병으로 성한 곳이 없어 모두들 피하는 인생이다.
그런데 이 둘의 삶은 그냥 ‘현실’에서의 삶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어서 그에 대한 심판이 있다. 22-31절의 내용에 대해 많은 설교나 해설이 있고 각 구절에 대해 묵상할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31절 ‘모세와 선지자’,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나는 자’이고 이는 16절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와 연결된다.
즉 주님께서 이렇게 장황하게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 하시는 이유, 그리고 왜 18절에 갑자기 ‘무릇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림당한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는 말씀을 하시는 이유 모두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됨’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지난 11절에는 불의한 재물에 충성할 때 참된 것을 우리에게 맡기실 것을 말씀하는데, 12절은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고 말씀한다. 즉 ‘참된 것’은 하나님의 복음이고 진리이고 참된 현실이며, 원래 이 복음은 우리를 위해 주어진 ‘너희의 (우리의) 것’이지만, 불의한 재물 혹은 작은 것에 충성할 때 받을 수 있음을 말씀한다.
오늘 말씀은 더 나아가서 율법에서 정해놓은 복과, 복음의 관계 혹은 차이를 보여주시는데, 율법에서는 선하게 살면 ‘좋은 인생 (25절)’이 보장받고 율법을 어겨 여호와를 떠나면 거지같이 고생할 것을 말씀하는데, 이러한 말씀 즉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까지이고 이제는 상황을 초월한 참된 현실인 ‘하나님의 왕국’이라는 것이 ‘복음전파’된다. 즉 하나님의 왕국은 율법과 선지자가 현세만을 말했던 것과는 달리 영원을 포함하는 것이고 이러한 복음이 전파되기에 현실상 재물의 노예됨에서 해방될 수 있다. 거기에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즉 부활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주님은 17절과 31절에서 ‘모세와 선지자들’을 중시하시는데 그 이유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언약’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과의 쌍방적인 관계인 동시에 일방적인 언약이기 때문에 무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율법을 폐하지 않고 완성하셨다. 율법과 선지자는 끝났지만 모든 것이 맞아 들어가게 하신다. 그래서 결혼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고, 이혼이나 음행에 대한 정죄하시는 것 보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길, 혹은 신약의 경륜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결국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는데, 16절은 원어로 ‘모두가 그 (하나님의 왕국) 안으로 비아조 (use by force, 밀려 넣어’지’다, '중간태', 현재형)’ 된(한)다. 이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왕국이라는 복음 외에는 선택이 없다. 그 안으로 밀려 넣어지든가 혹은 침입하든가 아니면 망하든가 둘 중 하나다. 율법에서 말하는 현세의 복을 영원한 영광에 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롬 8:18).
주님, 눈 앞의 현세만을 위했던 과거 율법과 선지자를 넘어 이제 영원을 바라보게 하는 하나님의 왕국이 선포됨을 감사합니다. 이를 위해 재물이 쓰여지고 그 안으로 우리가 힘을 다해 들어가기 원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읽습니다. 현재의 자신만을 위해서, 나 자신의 구원만을 위해서 사는 것에서 우리를 구원하소서. 하나님의 왕국이라는 큰 그림, 그 복음을 보기 원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길이고, 영원하며 진정 빛나는 것임을 깊이 체험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