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 쓰임 받기 보다는 남을 실족하게 한 때가 더 많았던 것 같다. 이렇게 실족하게 하는 문제에 대해서 주님은 매우 엄한 경고를 하시는데 ‘많은 사람들’도 아니라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고 말씀하신다. ‘실족’의 원어는 ‘스칸달론’으로 ‘올무에 걸어놓는 막대기, 올무, 발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무엇, 다른 이들을 죄로 인도하는 사람 혹은 무엇’ 등의 의미이고, 영단어 ‘스캔들’의 어원이다.
그런데 ‘실족’이라고 번역했기 때문에 ‘실수’를 연상할 수 있지만 단지 실수함으로 다른 이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는 것은 다행히 실족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말 그대로 실족은 ‘올무’와 관계된 것이고 거기에는 다분히 계획적이고 의지적인 면이 있다. 그래서 정죄함을 면하지 못한다. 그런데 이러한 실족의 문제와 그에 응당한 엄중한 심판을 말씀하고 나서 ‘용서’를 다루신다.
용서에 대해 먼저 ‘스스로 조심하’는 것이 필요한데 (3절) 1-2절의 실족할 수 있음을 경고하신다.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의 원어는 ‘만일 네 형제가 네 안으로 죄를 범하거든’이라고 되어 있는데, 즉 먼저 나와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죄를 뜻한다. 다른 이들이 하나님이나 그 외 타인에 대해 죄를 범할 때에도 사랑으로 경계하고 주의를 주는 것이 필요하지만, 여기서는 우선 자신에게 해를 끼친 사람들을 말씀하는데, 이러한 이들에 대해 먼저 ‘경고하’라고 명하신다. ‘경고’는 ‘꾸짖는’ 것인데 죄를 지었다고 무조건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죄를 알게 하기 위해 꾸짖는 것이 필요하다.
꾸짖게 될 때 형제는 그 죄를 깨닫고 ‘회개’를 요구받게 되는데, 회개하지 않으면 용서할 수 없다.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조건 용서’는 사실상 의미가 없다. 주님께서는 ‘무조건 용서’를 하셨지만, 우리로 회개하게 하신다. 어쩔 수 없이 ‘무조건 용서’를 해야할 때가 있는데, 그것은 상대방에서 회개를 할 수 없는 상황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놓아줘야 할 경우다. 용서는 원어적으로 ‘놓아줌’이다. 마음으로 붙잡고 있으면 용서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것이 힘들다는 것을 제자들은 알았기에 ‘믿음’을 구한다.
그런데 용서는 용서로 끝나지 않고 목적이 있는데, 관계의 지속을 위한 것이다. 만일 어떤 이유에서든 관계를 지속할 수 없을 때는 그냥 마음으로 놓아주고 끝날 수 밖에 없지만,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오는 관계라면 계속해서 용서함이 필요한데, 이 관계는 지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난 후 우리에게 ‘네 죄를 용서한다. 그냥 나를 떠나 살아라’ 라고 말씀하신다면 얼마나 두려운 일이겠는가? 용서는 더욱 깊은 관계를 세우는 것이 그 목적이다.
어제 영화 ‘침묵 Silence’을 보았는데, 17세기 일본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대 때 크리스천들이 박해받는 가운데 예수회 신부들이 선교하러 가서 일본 가톨릭 신자들에 대한 박해 가운데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것에 대해 좌절하는 것을 그렸다. 당시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순교를 당했는데, 주인공인 포루투갈 출신의 신부가 고뇌를 했던 이유는 (내가 볼 때) 부활 신앙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위해 순교하는 것인가 아니면 신부 자신을 위해 고통을 당하는 것인가 혼란을 겪은 것은 죽음이 끝인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또 거기에는 계속 배교를 거듭하는 이를 용서해 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또한 종교적 용서를 베푸는 것이지, 용서의 원래 목적인 ‘하나님과의 관계’ 면은 다루어 지지 않았다. 용서는 내 마음 편하기 위해 주고 받는 것이 아니라 회복될 수 없는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해 회복이 불가능한 우리에 대해 그의 아들을 화목제물로 삼으셔서 용서 하시고 하나님과 우리, 그리고 이스라엘과 이방을 화목하게 하셨다.
이러한 용서를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한데, 그냥 믿음이 아니라 살아있는 믿음이 필요하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라고 말씀하신 주님은 결국 제자들이 믿음 없음을 밝히신다. 원어에서는 ‘만일… 있었더면… 말했을 것이다’ 즉 ‘만일’이라는 말은 제자들이 믿음이 없었다는 뜻인데, ‘있었더면’과 ‘말하다’는 미완료 시제이다. 즉 믿음이 있었더면 과거에 이미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는 말씀이다. ‘뽑히다, 심기다, 순종하다’는 아오리스트이다. 왜 믿음이 있었다면 그런 말을 했겠고 그 뽕나무는 수종했을 것라 말씀하실까?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지만 어떻게 보면 쓸데없는 일을 하는 것 같다. 뽕나무가 뿌리채 뽑혀 바다에 심기는 것은 놀라운 일이지만 그런 일이 필요한가? 용서는 이렇게 불필요한 일이라고 생각될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믿음’을 말씀하시며 ‘순종’을 또한 언급하신다. 1절은 ‘제자들’이지만 5절은 ‘사도들’ 즉 ‘보내심을 받은 이들’인데, 이들은 뽕나무 같은 존재들이다. 이들은 그들의 출신에서 뽑혀 바다인 이방에까지 심기기 위해 보내심을 받았고 또한 순종할 이들이다. 주님께서 이미 믿음으로 말씀하시고 선포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7-10절은 주종 관계와 순종을 말씀하며 종들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자세는 항상 종의 위치를 취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신다. 주님을 온전히 주인으로 모시며 섬길 때 ‘우리는 무익한 종입니다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라고 고백한다. 이러한 고백은 순종의 고백이며, 이 순종은 믿음을 보여주고, 이러한 믿음이 있기에 용서하며, 용서함으로 우리가 받아야 할 연자 맷돌의 형벌이 옮겨지고 주님과 영원히 동락하는 귀한 관계가 이루어진다.
주님, 주님과 더욱 깊은 관계로, 형제 자매와 더욱 사랑하는 관계로 이끄소서. 믿음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내 안에 더 깊이 역사하셔서 주의 용서를 묵상하며 나로 충분히 용서하며 관계가 새롭게 이끌려 지도록 순종하는 종의 자세를 잃지 않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