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는 ‘랍비’라는 말을 쓰지 않고 대신 존칭으로서의 선생을 의미하는 헬라어 ‘에피스타테스’를 계속해서 쓴다. 주님의 사역은 우선 이스라엘 중심이었지만 아마도 누가는 그의 복음서를 쓰면서 이방에 대해 염두에 두고 써내려갔을 것이다.
나병 환자 열명을 만나시는데, 아마도 지역적으로 보아 이방인이 섞여있는 무리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을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부르지 않고 “예수여! 에피스타테스여!” 라고 부른다. 그들이 모두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어도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부르지 못했을 수 있다. 저주받은 나병 환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상태는 그들이 이스라엘 사람이건 이방인이건 유대감을 갖게 한다. 죄인들도 그들만의 끈끈한 공동체가 있다.
주님께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는 명에 순종해서 그들은 갔는데, 가다가 깨끗해졌다. 15-16절은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기록하는데, 18절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고 물으시는 것을 보아 아마도 다른 이들은 모두 이스라엘 사람이었을 것 같다.
이러한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가? 주님께서 ‘제사장에게 보이라’는 명령은 구약에 근거해 이미 나은 것을 의미한 명령이었지만, 구약에 대해 상대적으로 잘 모를 수 있는 (요 4:22) 사마리아인에게는 그의 나음에 대한 '체험'이 전부였다.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주님께 돌아와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나은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누가는 나머지 아홉에 대해 기록하지 않지만 아마도 그들도 나음을 체험했음에도 구약의 명을 따라 ‘예수 선생이 제사장에게 가라고 했잖아? 나음을 받아도 먼저 제사장에게 가야지’ 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아니면 아예 그냥 자신들의 길로 갔을지도 모른다.
종교적인 지식과 경험은 종종 은혜를 막는다. 확실한 것은 내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지 못하고 병들어 있다가, 주님을 믿음으로 온전히 해방되었음을 깨달았을 때에도, 여러 종교적인 이유를 들어 이에 대해 감사하지 못하고 구원을 누리지 못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주님 한 분 만으로 감사할 수 있다면 내가 온전히 나았음을 고백하고 누리는 것이다.
18절에는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는데, 유대인들이 들었다면 돌로 쳤을 말씀이다. 주님은 당신에게 돌아와 경배했던 사건이 바로 ‘그 하나님, 호 떼오스’에게 돌아와 경배하는 것임을 말씀한다. 소위 삼위일체에 대해 우리가 자꾸 헷갈리는 것은 예수님은 그냥 ‘하나님의 아들’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삼위일체를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으로 말하는데, 이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그 하나님’은 ‘아버지 아들 성령’이시며 그 이름은 ‘예수’시다! 그래서 마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단수)으로 침례를 베풀고” 라고 기록하는데, 그후에 제자들이 침례 (혹은 세례)를 줄 때 ‘아버지의 이름과, 아들의 이름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하지 않고 오직 ‘예수 이름 안으로’ 세례 (혹은 침례)를 베풀었다. 물론 삼위 안에 순서는 ‘아버지 아들 성령’이다. 그래서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으로 부르지 않고,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며 그 이름은 예수다.
‘하나님 나라’의 임함 (옴)과 임재 (있음)도 같은 원리임을 20-21절에서 볼 수 있다. 지난 10:9은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 라고, 또 11:20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라고 기록하다가 이제 21절은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말씀한다. 즉 하나님의 왕국이 ‘가까이 왔’고, 또 ‘이미 왔으며’ 이제 ‘있다’라고 말씀한다. 20절은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하나님의 왕국은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데, ‘볼 수 있게’의 헬라어는 ‘파라테레시스’로 ‘자세히 관찰함’을 의미한다. 앞으로 재림 때에는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그의 왕국이 임하지만, 주님의 초림에는 비밀스러워서 눈으로 그냥 보이는 것도 아니고 자세히 관찰해서 볼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의 헬라어는 ‘하나님의 왕국은 너희들 가운데 있다’ 라고 번역할 수 있는데, ‘너희들’은 ‘믿는 이들’이 아니라 주님을 박해했던 바리새인들이다. 즉 이 하나님의 왕국은 인간적인 관계 특히 종교적인 바리새인들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우선 그들 가운에 계셔서 말씀하시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래서 사람들이 계속 보고 관찰해도 믿음이 없으면 볼 수 없었다.
주님, 이제까지 많이 배웠던 여러 종교적인 관념을 넘어 지금 살아계신 주님을 다시 뵙고 그 임재하심을 누리기 원합니다. 주님은 승천하셨고 이제 하늘에 계시지만 주님의 영으로 우리를 살리시고 하나님의 왕국의 실제를 살 수 있게 하심을 믿습니다. 왕국의 실체이신 주님 안으로 더욱 들어감으로 우리도 주님 안에서 서로 지어져 가기 원합니다. 오늘도 종교적 관념에서 저희를 구원하시고 주의 은혜 안에서 감사가 충만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