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공관복음인 마태 마가 누가복음 모두에 기록된 내용이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이 사람은 젊은 관리였는데, ‘무엇을 행해야 영생을 얻는가’라는 질문을 한다. 나이는 젊지만 영원에 대한 관심이 있다. 즉 영적인 것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다. 주님께서는 ‘행함으로 영생을 얻는 방법’에 대한 질문에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시는데, ‘계명’을 언급하시고 제일 커 보이는 죄들로 시작해 ‘부모 공경’ 문제를 말씀하는 것 같지만 사실 이 모든 계명이 다 중요하다.
이 젊은이는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라고 말하는데, 이러한 대답과 그의 영원을 향한 마음에 대해 마가복음에서는 주님께서 그를 사랑하셨다고 기록한다. 참으로 기특한 젊은이기는 하다. 그의 재물을 믿고 죄를 짓거나 방탕하지 않고 모든 계명을 지킨 청년이다. ‘한 가지 부족한 것’에 대해 마태복음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라고 묻는데, 그렇게 자신있게 말할 정도로 그는 매사에 행위로 보아 완벽을 추구했던 사람으로 보인다.
주님은 마지막으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자 이 말씀에 그 부자 청년 관리는 근심하며 주님을 떠난다. 이 말씀은 모든 부자들은 재물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어야 한다는 말씀으로 이해해야할까? 주님께서는 이어서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지만,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재미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낙타’라는 단어는 영어로 ‘camel’인데 헬라어로는 ‘카멜로스’ 이고, 이 단어는 원래 히브리어 ‘가말’에서 유래했다. 그런데 ‘가말’은 또 ‘가맬’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것인데, ‘모든 것을 가지고 다루다, 풍성하게 딜을 하다, 주다, 되받다’ 등의 의미이다.
주님께서 여러 동물들 중에 ‘카멜로스’를 말씀한 것이 흥미로운데, ‘바늘귀라는 문을 통과하기 위해 낙타는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해석도 있지만, 바늘귀라는 문이 있다면 거기를 통과하며 무릎을 꿇어야 하는 것이 어디 낙타 뿐이겠는가. 그래서 ‘가맬’이라는 말에서 소위 ‘올인’이라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우리의 모든 인간적인 선행으로 ‘올인’해도 행위로는 결국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 처럼 어렵다는 의미, 아니,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놀라며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라고 묻는 것이다.
이에 대해 주님은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고 답하시는데, 마치 현문우답으로 들린다. 베드로가 무슨 뜻인가 해서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라고 말하는데, ‘우리 정도면 되겠습니까?’ 라는 질문이다. 베드로의 말은 젊은 청년 관리와 다르지 않다. 주님의 부르심에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는데, 그 정도면 영생을 얻을만 합니까 즉 “나는 저 부자와는 다르게 ‘가맬’했는데 이정도면 되겠죠?’ 이다.
그런데 주님은 베드로나 제자들에 대해 말씀하지 않으시고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라고 답하신다. 하나님의 왕국은 선행은 물론이고 재물과 더불어 천연적이고 인간적인 관계를 초월한다. 물론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딤전 5:8)’는 말씀도 있지만, 친족 혹은 가족은 ‘하나님의 왕국’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의 왕국’이라는 새롭고 영원한 지경 안에서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전에는 관계없던 사람들이 나의 집, 아내, 형제, 부모, 자녀같은 가까운 이들로 이어진다. 이러한 것은 행위로는 불가능하고 주님 안에서 거듭남으로만 가능하다.
주님, 선을 행함으로 영생을 얻지 못함을 압니다. 다만 주님의 영원하신 생명이 내 안에 계시는 것, 주님과 주님을 보내신 아버지를 아는 것이 영생임을 믿습니다. 현실에서는 주님께 올인은 커녕 제대로 드리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내게 믿음 주소서. 나의 ‘올인’함으로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의롭다 하시고 생명 주시고 나의 능력 되심으로 내가 ‘올인’해서 살 수 있음을 알게 하소서. 나의 아이들이 나의 소유가 아니라 주님의 자녀들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 나의 부모도 형제도 주님께서 계시기에 그 관계에 의미가 있음을 고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