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에 ‘회개’라는 말은 없지만 진정한 회개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특히 재정적인 면에서 온전한 회개를 말씀하는데, 이것은 인간의 기준이나 율법의 의를 넘어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기준인 ‘하나님의 의’와 관계있다.  삭개오는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라고 말하는데, 그의 재산이 100이라면 50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속여 뺏은 것들에 대해 네배로 갚겠다는 말은 나머지 50도 거의 모두 포기할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들린다. 

 

말그대로 ‘올인’인데, 이틀전 젊은 부자에 대한 말씀에서는 ‘올인’을 해도 인간의 어떠함으로는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는 것을 배웠지만, 결론적으로 그 젊은 부자는 그 부를 포기하지 못했음을 보는데, 오늘 말씀에서는 삭개오가 회개함으로 그 회개의 열매로 주님께 ‘올인’함을 보여준다.  그의 ‘올인’이 먼저 있지 않고 주님의 초청이 우선함으로 그가 회개하여 믿음에 의한 ‘올인’이 있다.

 

율법의 의에 따르면 속여 뺏는 것의 네 배를 갚으면 그만이다.  (물론 이것도 힘든 것이다) 하지만 삭개오는 이 율법의 기준을 말하기 전에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고 말한다.  일반 ‘세리’가 아니라 ‘세리장’으로서 그가 직접 남의 재물을 속여 빼앗은 일은 많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수하에서 속여 빼앗은 것이 있고 이에 대해 그가 그 이익을 취했다면 그 부분에 대해서는 그도 속여 빼앗은 것이 된다.  그렇게 보면 ‘속여 빼앗은 것’의 네 배는 그 남은 절반을 넘을 수도 있다.  삭개오는 이러한 리스크를 과감하게 감내하는데, 그 이유는 주님을 만남으로 ‘하나님의 의’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세리들의 우두머리로서 재물은 많았지만 키가 작아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던 그에게 주님은 나무 위에 있던 그를 우러러 보시며 그를 초청하신다.  그리고 그의 고백에 대해 그의 ‘아브라함의 자손됨’을 선포하신다.

 

거의 모든 한글번역이나 영어 성경에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로 번역됐지만, 원어로는 ‘되었다, 에게네토, 아오리스트’이다.  즉 ‘아브라함의 자손’은 ‘혈통’에 의한 것이 아니라, ‘믿음의 원리’에 따른다.  삭개오가 이런 결정과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을 만남으로 그에게 주어진 믿음에 의해서이다.  그래서 그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다’. 

 

오늘 말씀은 특히 ‘친일파’를 떠올리게 한다.  친일파들이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은 과거 조국을 배반함으로 재물과 권력을 토색했고 그것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인데, 그래서 친일파 중에 현재 궁핍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별 비판이 없다.  아무리 친일파나 그 후손들이 예수님을 믿고 ‘회개’를 했다해도 과거 그 조상들의 행각으로 얻은 불의한 재물과 그를 투자함으로 불린 막대한 재산에 대해서 그들이 주님 앞에 다루심 받지 않고 계속 고집한다면 그들의 믿음은 헛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과연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서 온전한 회개를 경험하면 그의 집에 구원이 임하고 그는 과거의 재물 축적에 대해 하나님의 의에 따라 책임을 진다.  이는 그가 '아브라함의 자손됨'을 보여준다.

 

주님, 주님께서는 겉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시고 마음의 중심을 보심을 믿습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나의 소유를 고집하는 이 가련함을 불쌍히 여기시고, 정말 우리를 만나주셔서, 그 영광을 체험하게 하소서.  우리를 우러러 보시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우리를 초청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다시 듣게 하소서.  그 음성이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능력이 됩니다.  여러 곳에서 실패를 경험하며 갈등하고, 특히 소유는 많아도 그 영에 고통을 받고 있는 이들에게 찾아가시며, 주님의 신실한 일꾼들을 보내소서.  나를 보내소서.  과거나 현재 속여 빼앗은 것들이 생각나게 하시고, 주님 앞에 온전히 다루심 받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