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난해한 구절일 수 있다.  다른 포도원 비유나 농부, 혹은 포도 나무 비유도 있지만 그들과는 꽤 다른 비유인데, 세번 보내는 종들을 선지자들로, 그리고 아들을 그리스도로 해석하는 것이 맞겠지만, 그 아들의 죽음은 이 비유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사적인 면을 말하지 않는 것 같이 들린다.  이 비유의 열쇠는19절에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에 있다.  생명의 삶 해석과 같이 이 비유는 ‘포도원의 악한 농부들’에 대한 것이다.  하지만 이 비유 역시 그리스도의 구속사와 새로운 일을 행하심을 암시한다 (고후 5:17, 10:20).

 

흥미로운 것은 이 비유는 ‘백성에게 (라오스)’ 말씀하셨고, ‘농부들’에 대한 것이었으며, 이 비유를 듣고 걱정한 이들은 백성들이었는데 (16), 정작 찔린 것은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다.  ‘농부’는 헬라어로 ‘게오르기오스’인데, 땅을 뜻하는 ‘게’와 ‘일하다’를 의미하는 ‘에르곤’의 합성어이다 (영어 이름 George의 어원이기도 하다).  즉 농부는 땅에서 일하며 땅의 소산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다.  반면에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은 거룩하신 주님의 말씀을 가지고 사는 이들로 보인다.  그들에게 땅은 속된 것이었고 더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주님의 관심은 땅에 있다.  그래서 주기도문에서 ‘주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말씀하고, 오늘 말씀에서도 포도원 주인은 그 땅의 소산 중에 요구를 한다.  땅은 거룩해져야 한다.  나사렛에서도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다.  문제는 일을 맡은 농부들이다.  이들이 아무리 주의 말씀을 가졌다고 해도 그들의 목적과 관심이 땅과 그 소산에만 있을 때 (14) 그들은 그 땅의 주인을 잊고 그와 동일한 아들도 무시하고 죽인다.  13절 ‘혹 그는 존대하리라’의 ‘혹’은 원어로 ‘이소스’인데, ‘동일하다’의 의미이다.  즉 ‘…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를 나와 동일하게 존대하리라..’의 뜻이다.  그 땅의 주인과 그의 아들은 동일하다.  (소위 말해서 ‘양태론’을 말하는 것은 아님)

 

17절에서 주님은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음을 말씀하시는데, 바로 주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다.  ‘모퉁이의 머릿돌’은 '모퉁이'라는 말 때문에 별로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을 수 있지만, 고대에 석조 건물을 건축할 때, 중심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기초를 다진 후 건물의 모퉁이를 시작으로 건축되어져 간다.  이 모퉁이의 머릿돌은 전체 건물이 지어질 크기와 방향 즉 각도를 정하기 때문에 건축에서 '기초석'이 된다.  바울은 고전 3:11에서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하며 ‘기초’ 즉 땅이 그리스도임을 밝힌다.  바울과 베드로는 ‘모퉁이돌’ 역시 그리스도이며 우리가 그 위에 서로 지어져 감을 말씀한다 ( 4:11, 벧전 2:7, 2:20-22).

 

그래서 이 모퉁이의 머리는 기초석, 즉 새로운 건축의 시작이다.  이러한 새로운 건축에 참여하지 않으면 이 돌 위에 떨어져 깨지거나 이 돌이 사람에게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든다.  옛것을 끝내고 새것을 시작하는 이 기초석에 연결되어 건축되어야 한다.

 

주님, 이 땅의 더러움을 피해서 독야청청하고 싶은 마음이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되지도 못할뿐더러, 주님은 우리를 땅에 두셨고 이 땅을 일구며 주의 거룩함을 맺기 원하심을 봅니다.  그 목적은 그리스도시고, 그 기초와 기준도 그리스도이심을 배웁니다.  이 터 위에 열심으로 서로 건축하게 하소서.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용기를 얻고 행동을 취함으로 주의 몸된 교회를 건축하는 역사를 하도록 힘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