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꽤 오래 성경을 아예 읽지 않은 적이 있다. 성경을 읽다보니 종종 논리적인 면에서 말씀끼리 부딪치는 부분들이 발견되었고, 이에 대해 그 어디에서도 돌파구를 찾을 수 없어서 심적으로 매우 괴로왔기 때문이다. 이제 이러한 면에서 완전 자유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에 대한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는 배웠다. (그 중에는 잘못된 번역 문제도 적지 않다. 한글 킹제임스가 낫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원어를 볼 필요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요즘은 컴퓨터 성경 프로그램으로 파싱이 쉽게 된다.)
어제 말씀에서 사두개인들이 구약의 내용과 떠오르는 신약의 부활의 개념에 대해 논리적으로 맞지 않게 들린다고 주님을 시험했는데, 이번에는 39절 ‘선생님 잘 말씀하셨나이다’ 라고 말한 서기관들에 대해서 주님이 친히 시험하신다 (마 22장에는 바리새인들도 등장한다). 서기관들은 성경을 모두 외울 정도로 박식한 사람들인데, 그들이 대답하지 못하는 논리가 나온다. 즉 다윗이 자신의 자손으로 오는 그리스도에게 ‘주’라고 부른 점이다. 자신의 육적인 자손이라면 자신의 한참 밑이어야 하는데, 여호와와 동일한 ‘주’로 부른다.
결국 그들은 대답하지 못하는데 (마 22:46), 자신들이 가장 잘 안다는 성경 기록이 그들에게 올무가 되었다. 그럴 때 그들이 해야했던 것은 겸손히 주님께 나아와 물어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 문제에 대해 계속 의문을 품고 묵상을 했을까? 아니면 그냥 ‘인간의 논리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도 있다’ 라며 자위했을까? 인간의 논리를 넘어서는 말씀도 있겠지만 주님 앞에 겸손히 나오면 말씀을 열어 주신다.
성경에서 어려운 주제들이 많이 있는데 서로 부딪치게 (혹은 비논리적으로) 들리는 대표적인 것들로 소위 ‘예정론 대 자유의지론’과 ‘삼위일체’, 그리고 말세에 대한 예언 등이 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예를 들어 현대 과학의 입장에서 볼 때 성경의 여러 기록에 대해 의문이 들 수도 있다. 베드로는 벧후 3:16에 바울의 서신 중에 특히 말세에 대한 기록을 들어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고 말하는데, ‘배우지 못하고 굳세지 못한 이들이 다른 기록들 처럼 왜곡함으로 스스로 멸망으로 향한다’ 즉 배우는 것과 굳셈이 필요함을 말씀한다. 배우는 것에는 내가 모른다는 겸손함이 바탕이 되고 굳세기 위해서는 주를 의지함이 필요하다.
44절 주님께서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라는 질문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 될 수 없다는 말씀이 아니라 주의 성육신을 암시하는 말씀이다. 주의 성육신하심으로 다윗의 고백과 선포가 이루어졌다. 대답하지 못한 서기관들은 성경은 많이 알았지만 정작 알아야 했던 것은 몰랐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는 척하며 거룩한 척 귀한 척 함으로 ‘긴 옷을 입고 다니고 .. 시장에서 문안 받고 회당의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했다. 더우기 (종교적 권위로) 힘없는 과부들의 집들을 삼켰다. 그들에게 성경은 순종과 배움의 기준이 아니라 치부와 강압의 도구였다.
며칠 전 삼위일체에 대해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은 잘못되었고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고 그 이름은 예수라고 했지만, 사실 성경 여러 곳에서 이렇게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을 기록한 부분이 적지 않다. (행 10:38, 롬 15:16, 롬 15:30, 고전 6:11, 고전 12:3, 고후 13:13, 엡 2:22, 벧전 1:2 등등) 그렇다면 하나님은 하나인가 셋인가? 아니면 하나이면서 셋인가? 왜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가? 그냥 인간의 논리를 벗어난 문제이기에 ‘무조건 외워’야 하는가?
요즘 다시 이러한 것들에 대해 고민하며 생각해 보다가 전에도 나눴지만 ‘삼위일체’라는 말의 문제와 기독교에서 계속 써온 ‘하나님’이라는 칭호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나님’은 말 그대로 ‘하나’를 의미하는데, 이것이 좋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아예 영어의 God 처럼 ‘신’으로 말하거나 헬라어로 ‘호 떼오스’라고 읽어보면 느낌이 다를 것이다. 예수의 이름이 중요한 것은 요 14:6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의 말씀처럼 주님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 자체를 알 수도 그에게 올 수도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공로와 그와의 관계 없이는 하나님은 그냥 범접할 수 없는 ‘호 떼오스’로 머문다. 하나님께서 세 분 이시지만 하나인 이유는 육신된 우리가 영이신 하나님께로 올 수 있는 비밀과 길이 된다. 그래서 '단일신'이 아니라 '유일신'이시다. '모노 (단일)'가 아니라 '트레이스 (3)'가 '헨 (1) 안으로' 가 된다 (요1 5:8).
주님, 예수의 이름 안에서, 또 그 이름을 통해 아버지께로 옵니다.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알지 못한다고 고백합니다. 가르쳐 주옵소서. 주님은 크신 분이고 평생을 통해, 그리고 영원을 통해 배우고 알아야할 분이심을 고백합니다. 내가 하려는 모든 것을 그치고 오직 주 앞에 나아가서 주께 배우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