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말씀하실 때 '진실로'의 원어는 '아멘'이다. '내가 아멘 아멘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이다. 그런데 3절에는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라고 되어 있고, 이것은 원어로 '진리' '' 혹은 '현실'을 뜻하는 '알레떼이아'에서 온 단어이다. 부자들이 낸 많은 액수의 헌금에 비해 과부는 고작 '두 렙돈' 푼돈이었지만 주님께서는 '현실적으로' 과부의 것이 더 많다고 말씀한다. 그 이유가 4절에 나오는데, 바로 '생활'과 관계되기 때문이다. 영어에서는 actually apparently라는 단어가 상대적으로 쓰이는데, apparently는 부자의 헌금이 비교할 필요도 없이 훨씬 더 많았지만, 주님의 기준으로는 actually 과부의 두 렙돈이 더 많은, 아니 모든 것을 넣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두 렙돈이 연보로 쓰여진다면 얼마나 쓰여질 수 있을까? 아예 그 가난한 과부가 그냥 쓰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 과부는 물질에 대한 소유권이 자신에 있지 않음을 알았던 것 같다. apparently 내 것 같아 보이지만 actually는 내 것이 아니다.

말세를 사는 이들에 대한 명령 1

말세에 대해 묻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는 먼저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고 있으라 (현재진행 명령형)'고 말씀한다. 즉 첫째 명령은 '(미혹을 받지 않게) 주의하고 있으라'이다. 특히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올 것인데, 주님의 이름 '안에서'가 아니라 '에피, 위에서'로 되어 있다. 즉 주님의 이름으로 가장해서 올 것이다. 더우기 주님처럼 '에고 에이미'라고 하며 카이로스가 가까왔다고 말할 것인데, 그들을 따르지 말라고 하신다. 이러한 것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 그래서 '주의해야'한다. 주님은 승천하신 그대로 오실 것이다 ( 1:11). 이렇게 주의하고 있으면 '전쟁과 소요를 들을 때마다 (원어에는 '소문'이라는 말은 없다)'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9).

증거가 될 일들

가끔 신앙 생활에 대해 질문이 생길 때가 있다. 과연 이런 것들이 필요한가? 그냥 잘 믿고 착하게 살면 되는 것 아닌가? 그냥 남들 하는 대로 하면 되는 것 아니가? 그런데 그렇게 하면 '증거가 되'지 않는다. 12절에는 '주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을 때' 믿는 이들이 당할 박해와 더불어 '회당과 옥에 넘겨 주며 임금들과 집권자들 앞에 끌어 갈' 것을 말씀한다. '회당'이면 지금의 교회같은 것인데, 주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정치적으로는 물론이고 종교적으로도 고립되고 고난 받을 것을 말씀한다. 그리고 이러한 것이 증거가 될 것이라고 한다. .. 주님을 믿는 것은 간단한 것이 아니다. 물론 이것은 당시 예루살렘 함락을 두고 말씀하신 것이겠지만, 말세를 사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것들이 있다.

말세를 사는 이들에 대한 명령 2

14절은 '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궁리하지 않도록 명심하라'고 하는데, '미리 궁리하고 있지 말라'가 현재형 명령이다. 환난에 임박해서 이러한 명령에 순종하려면 평소에 우리의 마음에 주의 말씀을 두어야 한다. 그래서 벧전 3:15에는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고 말씀한다. 주님과 이러한 교제가 있을 때 15절 말씀처럼 환난의 때에도 주님께서 친히 (내가)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주실 것이다.

주님의 이름 때문에

도무지 주님의 이름이 무엇이길래 이렇게 그 이름을 가지고 (8), 그 이름 때문에 (12), 그 이름을 통해 (17), 등등 문제가 생기는 것일까? 그리고 믿는 이들은 왜 이 이름을 그렇게도 붙들어야 하는가? ' God' 혹은 '하나님, 하느님' 등의 말은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다. 세상 모든 민족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인간으로 성육신 하신 예수님이 많은 이들에게 거치는 돌, 부딪칠 돌이 된다. 예수님의 이름은 구원하시는 능력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거치게 하는 이름도 된다.

16절에는 '너희 중의 몇을 죽이게 하겠고'라고 하셨지만 18절에는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한다. 논리적으로는 맞지 않지만 19절에는 '너희의 인내로 너희 혼을 소유하리라'고 말씀하는 것으로 보아 이러한 죽임당함과 고통을 통과할 때 인내하면 우리의 목숨 혹은 혼은 소유되고, 이는 부활을 통해 가능함을 본다.

20절은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그녀, 예루살렘)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고 말씀한다. 그런데 너무 늦은것 아닌가? 군대들에 에워싸이기 전에 미리 알고 도망하는 것이 맞는 것 아닐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직도 조금 시간이 있음을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 조금 남은 시간은 '도망하는' 것과 '나가는 것' 그리고 '그리로 들어가지 말' 것을 위해 있다. 즉 이 때는 맞서 싸우거나 증인의 삶을 위하는 시간이 아니고 도망해야할 시간이다. 왜냐하면 '이는 이 날들이 복수의 날들임이니, 모든 것을 기록된 대로 이루려 하는 것이라 (한글 킹제임스, 원어도 같음)' 이라고 22절은 말씀하기 때문이다. 이 날은 그냥 환난의 날이 아니라 '복수'의 날이다. 예루사렘은 평화의 도시이지만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라는 지난 13:34 말씀처럼 복수가 필요한 도시다.

이 복수는 아이 밴 사람들과 젖 먹이는 이같은 연약한 이들까지도 불쌍히 여기지 않고 칼날에 쓰러질 정도로 참혹할 것인데, 이 복수의 날은 우선 AD 70년 예루살렘 함락을 의미하지만, 25절 부터는 언제일지 모를 주님의 재림을 말씀한다.

말세를 사는 이들에 대한 명령 3

주님은 다시 34절에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고 말씀하며 '조심하고 있으라'고 명하신다. 그리고 36절에는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고 말씀한다. 조심하는 것은 기도함으로 가능하다. 기도함으로 내 자신을 돌아보며 여러 가지 요인들로 마음이 둔해지지 않게 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주님, 소위 '주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주님은 바라보지 않는 저를 봅니다. 나의 하루 생활 속에 주님은 주님 되셔야할텐데 여러 가지 것들로 저의 마음이 분주합니다. 저를 온전히 속량하소서. 나의 마음과 눈과 손과 모든 지체를 구원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