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절은 ‘유월절’이라는 아람어가 쓰인다.  즉 ‘그런데 파스카 (유월)라는 아주몬 (접두사 아 + 누룩 주메 = 무교)  절기가 다가오고 있었다’로 되어있다.  누가는 이방인들에게 ‘파스카’를 설명하며 누룩없는 절기라고 말한다.  누룩 없는 빵을 만들어 먹는 민족도 적지는 않았겠지만 아마도 대게는 누룩으로 부풀어 오르게 해서 먹기 편한 빵을 만드는 것이 보편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왜 이들은 누룩없이 먹었을까?’ 하는 질문과 함께 ‘고통’ ‘임박한 재난’ ‘환란’ 등을 연상했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뒤에 나오는 2절에는 그러한 파스카 절기에 종교지도자들이 주님을 어떻게 죽일지 모의하고 있는 것을 기록한다.  아무리 뛰어난 제도나 절기를 가졌다해도 그 본질을 찾고 누리며 순종하지 않으면 그 원 의미와 주체이신 그리스도를 잡아죽이게 된다.  그들은 하나님보다 사람들을 더 두려워했다.

 

가룟인 유다에게 사탄 (히브리어, 대적자)이 들어갔는데, 능동태 동사가 쓰였기 때문에 언뜻보면 사단이 무작정 들어간 것 처럼 들린다.  하지만 주님도 사탄도 사람에게 막무가내로 들어가지 않는다.  13:2에는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고 기록하는데, 마귀가 가룟 유다의 마음에 악한 생각을 넣었고, 가룟 유다는 그러한 생각을 떨쳐 버리지 않고 품었다.  결국 사탄 자신에게 모두를 내어준다.  그리고 사탄은 적극적으로 그의 안으로 들어갔다.  주님 역시 우리 전부를 내어 드리면 적극적으로 우리 안으로 들어오신다.

 

사단이 들어가서 한 인격을 사로잡으면 그 때부터 그 인격은 치밀하게 사단에 의해 쓰임 받는다.   가룟 유다는 대제사장들에게만 간 것이 아니라 ‘성전 경비대장들 (원어에는 군 지휘관들 혹은 장교들)’ 에게 까지 가서 예수님을 넘겨줄 방도를 의논한다.  그러자 그들은 기뻐했는데, ‘기뻐하다, 카이로’는 ‘은혜, 카리스’의 어원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기쁨이 은혜의 근원이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악과 거짓에 기뻐하는 근원이 될 수 있다.  유다는 그 때 부터 주님을 넘겨줄 기회를 찾는다.  ‘기회’는 ‘유카이리안’으로 ‘유카이로스’가 어원인데 말 그대로 ‘좋은 때’이다.  그런데 인간의 ‘좋은 때’는 자칫 주님을 파는 때가 될 수 있다.  히브리서 4:16에도 ‘유카이로스’가 나오는데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기록하며 ‘때를 따라 돕는 은혜’ 즉 이 좋은 때는 은혜 받을 만한 때이며 은혜를 사모할 때 임을 말씀한다.

 

8절은 주님께서 베드로와 요한에게 ‘가라, 준비하라, 우리가 먹게’ 라고 말씀하는데, 많은 절기가 그렇듯 유월절 파스카 역시 먹는 때이다.  먹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고 그 목적이다.  하지만 아무거나 먹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것 즉 무교병과 양을 먹는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신 참된 제물로서, 우리에게 성찬을 베푸시며 우리로 당신 자신을 먹으라고 초청하신다.  아무리 유월절을 경건한 마음으로 보낸다 해도 먹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종교 생활을 열심히 해도 주님을 먹고 마시지 않으면 주님과 상관이 없다.  11절은 다시 ‘먹는’ 것이 나온다.  주님을 봄으로 소망을 얻고, 그를 만짐으로 나음을 얻고, 그를 먹음으로 주님과 하나가 된다.

 

흥미로운 것은 10절의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 (남자)’에 대한 언급이다.  그렇게 맞아 떨어지는 것도 신기한 일이지만, 남자가 물동이를 가지고 가는 것도 신기한 일이라서 생명의 삶 해설은 보통 여자들이 물동이를 가지고 다니기 때문에 눈에 띠기 쉬웠을 거라 설명한다.  하지만 그 보다는 ‘물 한 동이’가 더 흥미롭다.  보통 여자들이 물을 길을 때 혹은 사람들이 집을 방문했을 때 씻을 물을 마련하는 물동이는 큰 항아리로 ‘후드리아’ 즉 ‘물’에만 관련있는 용기이다.  하지만 여기에 쓰인 단어는 ‘케라미온’으로 항아리 보다는 작은 크기의 ‘그릇’ 혹은 ‘토기’라는 말이다. 

 

이 단어는 성경 여러 곳에서 ‘그릇’으로 나오며 특히 우리 자신이 무언가를 담는 그릇임을 말씀할 때, 그리고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을 설명할 때 쓰였다 ( 9, 고후 4:7, 딤후 2:20-21 ).  ‘케라미온’은 ‘진흙’ 이라는 ‘케라미코스’가 어원이고 (아마도 영어 ceramic의 어원인듯), 이는 ‘토기장이’를 의미하는 ‘케라메우스’가 어원이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남자’는 하나님 아버지의 어떠하심을 보여준다.  토기를 들고 가는 이를 따라가자 필요한 만찬이 준비된다.  토기인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토기장이를 따라갈 때 모든 것이 때에 맞게 준비됨을 경험한다.

 

주님, 주님을 참으로 내 안에 모시고 주님을 먹기 원합니다.  내가 주 안에 주가 내 안에 계시기 원합니다.  나의 거짓되고 더럽고 덧없는 마음을 새롭게 하소서.  그릇인 내 안에 주님을 온전히 모셔 드리도록 나의 마음을 엽니다.  주님의 모든 역사하심은 주의 베푸심을 통해 가능함을 배웁니다.  주님의 은혜를 누리며 기뻐하는 하루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