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식사 시간이 되자 주님께서는 사도들과 함께 앉으셨다.  ‘앉으셨다’는 단어는 ‘아나핖토’라는 말로 비스듬하게 기대어 누운 자세다.  전형적인 유대인의 식사 자세인데, 그래서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서구식 해석에 의한 그림이고, 원래는 비스듬하게 누워 식사하는 모습이다.  영화 벤허에서 볼 수 있다.  ‘제자’라는 단어 대신에 ‘사도’라는 단어를 썼는데, 주님의 권위 아래 배우는 이들에서 성찬을 통해 주님께 보냄 받은, 대표하는 이들로 세워진다.  물론 제자들이 이 전에도 사도로 불림 받았고, 나중에도 ‘제자’라고 기록되지만, 성찬에 참여함에 있어 주님은 그들이 주님과 하나됨을 보여주신다.

 

주님께서는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고 말씀하신다.  ‘원하다’라는 단어는 ‘에피뚜미아’로 원래 ‘정욕’으로 많이 번역되었다.  주님은 정욕이 이는 듯한 뜨거운 감정으로 원하고 원하셨다 (에피뚜미아 에피뚜메사).  주님께서 언제 이런 식으로 말씀하신 적이 있었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라는 말씀도 하셨고, 나사로의 죽음에 눈물도 흘리셨고, 베드로의 고백에 감탄하며 교회를 말씀하신 적도 있었지만 ‘원하고 원하였다’라고 고백하셨던 적은 이번이 처음이요 마지막 같다.  12:50에는 ‘나는 받을 침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라고 말씀하셨는데, 아마도 이 ‘원하고 원했다’와 연결되는 것 같다.  답답한 마음으로 이 고난 받기 전에 사도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기 원하고 원하셨다.

 

거기에 16절 그리고 18절은 3 2중 부정을 쓰시며 강하게 말씀하신다.  우리 말에 이중부정은 강한 긍정을 의미하지만, 헬라어의 부정을 의미하는 ‘우케티’ ‘오우’ ‘메’ 모두가 붙어있을 때는 더욱 더 강한 부정을 나타낸다.  16절은 이 세가지 모두가 있어서 ‘never ever 결코 절대’라는 의미가 되고, 18절은 ‘오우 메’ 두 가지가 쓰여서 역시 ‘결단코’라는 의미가 된다.  주님께서 이렇게 강한 부정을 쓰신 적도 아마 여기에서만 볼 수 있는 것 같다.

 

이러한 강한 ‘원하고 원하심’과 강한 부정 ‘결코 절대로’가 가리키는 것은 바로 ‘유월절’ 그리고 '하나님의 왕국'인데, 주님은 유월절의 주체와 그 본래 의미이심에도 이 땅에서 옛 유월절을 사도들과 지키셨다.  15절은 ‘이 유월절’이라고 말씀하시는데, 16절에는 ‘하나님 왕국 안에서 그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충만, 완성) 결코 절대 (우케티 오우 메) 그로부터 먹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한다.  ‘이 유월절’은 지금 먹고 있는 유월절, 옛 계명의 어떤 것이지만, ‘그것’은 완성되고 이루어져야 할 유월절인데, 바로 뒤의 ‘새 언약’과 관계가 있다.  

 

17절은 ‘잔을 받으사’라고 기록하는데, 주님께서 잔을 집어 드신 것이 아니라 ‘받으셨’다고 한다.  주님께서 고난을 위해 받으셔야 할 잔을 받으셨고, 이에 대해 감사하시고 제자들에게도 동참을 권유하신다.  그에 비해 19 20절에는 주님께서 ‘떡을 가져’ 그리고 ‘잔도 그와 같이 하여’라고 한다.  18절까지는 옛것을 보여주고 19절부터는 새 언약에 대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 같다. 

 

19절부터는 우리가 아는 모습의 소위 ‘주의 만찬’의 모습이 나온다.  먼저 주님께서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신다.  그리고 20절에는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고 말씀한다. 

 

흥미로운 것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도 만찬에 대한 기록이 나오지만 그 순서와 내용이 누가복음과는 조금 다르다.  그리고 요한복음에는 아예 만찬에 대해 기록하지 않고 대신 ‘세족식’을 기록한다.  이미 여러 부분에서 주님께서 ‘생명의 떡’이심을 밝히셨기 때문이다.  아무튼 마태 마가 복음의 기록은 ‘떡’에 대한 내용은 같지만 ‘잔’은 ‘잔’보다는 ‘피’에 대해 더 강조해서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 ( 26:28)’을 말씀하고,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할 것을 말씀한다 ( 26:29). 

 

대신 누가복음에는 ‘다시 마시지 않을’ 것에 대한 언급이 먼저 나오고, 특히 ‘피’보다는 ‘잔’에 더 촛점을 둔다.  그 이유는 앞에서 ‘받으신’ 고난의 잔이 피를 의미하기 때문이고 그것은 그 원하고 원하셨던 침례를 통과하시며 구속하심을 이루시기 때문이었으리라 생각한다.  누가가 더 강조하기 원했던 것은 주님의 피를 통해 구속하심을 입는 것에 더해 그 ‘잔’이 바로 ‘새 언약’을 보여주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의 원어는 ‘이 그 잔 내 피 안에서 그 새로운 언약, 너희들 위에 부어지고 있다 (현재진행형)’로 되어있다.   주께서 잔을 가져다 우리에게 보이시며 말씀하시는 것은 그 잔이 새로운 언약이며 우리에게 부어지고 있음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주님, 떡을 나눔으로 주의 몸에 참여하고 공동체로서 하나가 되며, 주님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을 압니다.  주님께서는 2천 년 전에 보혈을 흘리시고 죽임 당하셨고 또 그 죽으심으로 우리는 단번에 죄사함을 얻었지만, 그 잔을 주목할 때, 주님의 새 언약이 계속해서 우리 위에 부어지고 있음을 봅니다.  옛 언약과 그 실행은 이제 그만 그치게 하시고, 주님의 그 새 언약이 우리 안에 더욱 분명해 지도록 우리를 이끄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