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레네 시몬은 공관복음에만 등장하고 요한복음에는 언급이 없다.  공관복음에는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는 대신 구레네 시몬이 지고, 주님은 그냥 ‘끌려 가’셨다.  요한복음에는 주님이 친히 자신의 십자가를 지셨다고 기록한다.  현실적으로 보아 그렇게 잠도 안주무시고 여러 심문에 시달리시고 채찍질 당하시고 무거운 십자가를 지는 것은 불가능할 듯도 하다.  (채찍질은 누가복음에는 기록되지 않는다. 다만 18:33에 주님의 언급이 있고, 빌라도의 ‘때려 놓아주겠다’는 기록이 있다)

흥미로운 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씀한 것은 공관복음이고, 요한복음에는 십자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가 주님 죽으실 때에야 십자가라는 말이 등장한다.  서로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인상이다.  그래서 모든 사복음서가 필요하다.  서로 맞지 않는 것 같은 내용들은 서로를 보완해 준다.  주님께서 그 어려운 상태에서 십자가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고 가셨다면 믿기 어려울 것이고, 동시에 아예 십자가를 지고 가지 않으셨다면 그것도 문제가 된다. 

그런데 그 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십자가’라는 단어이다.  이 헬라어 단어 ‘스타우로스’는 ‘십자가’라기 보다는 그냥 긴 ‘나무통’을 의미한다.  그래서 여호와 증인들은 주님 지신 것이 ‘십자가’가 아니라 ‘일자가’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십자가형은 원래 로마인들의 처형 방법인데, 라틴어의 ‘십자가형’은 crucifix라는 말로 cross (cruci) fix figure (fixus)의 합성어이다.  즉 ‘십자’에 매달린 인물, 혹은 십자가를 세움 등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이러한 단어는 원래 라틴말이지만 코이네 헬라어로 번역하려다 보니 ‘스타우로스’를 쓰게 됐는데, 이는 ‘십자’보다는 ‘일자’에 가까워서 그런 해석을 낳게 한다.

그런데 한면으로 과연 로마인들이 ‘일자’ 나무보다는 ‘십자’나무에 사람들을 달아 죽였을까 하는 문제인데, 사람을 죽이는 형틀을 일부러 만들기 힘든 ‘십자형’으로 할 필요는 없었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로마인들이 한 지역을 점령한 후에 대적자들을 마을 어귀에 매달아 죽였는데, 나무가 이미 있으면 그 나무에 매달았거나 없었다면 나무를 박아놓고 자신들을 대적하면 이렇게 될 거라는 본보기로 삼았을 것이다.  인체학적으로 십자가 모양이 더 고통을 주게 한다는 해설도 있기 때문에 로마인들은 극형에 대해 ‘십자’로 했을 수도 있다.

이러한 나무에 달아 죽이는 형은 당시 로마인들이 주로 행한 것이지만, 성경에서도 나무에 달아 죽는 것이 저주임을 말씀하는데, 40:19에서는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을 나무에 달리니 새들이 당신의 고기를 뜯어 먹으리이다 하더니’라고 기록하며 이미 이집트에서 그런 형집행이 있는 것을 보여주고, 21:23에는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고, 또 갈 3:13에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말씀한다.

십자가의 모습이 십자냐 일자냐에 따라 거기에서 파생되는 여러 신학적 해석과 교훈들에 차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쉽게 다룰 문제는 아니지만, 결국 그러한 것들은 해석의 차이고 파생되는 교훈들일 뿐이다.  십자가 혹은 일자가의 원 의미는 심판과 저주이고, 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받으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형틀인 ‘십자가’ 혹은 ‘스타우로스’를 오늘 내가 지고 있느냐다.   십자가는 분명 경배나 목도의 대상이 아니라 내가 지고 감으로 내 자신이 죽음에 넘겨지기 위한 것이다 (고후 4:11).

성경에서 그 어느 곳도 ‘십자가를 바라보라’는 말씀은 없는데, 12:2에도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즉 예수를 바라보라고 말씀한다.  6:14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씀하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기 때문, 즉 그리스도의 공로를 말씀한다.  2:15은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고 말씀하는데, 이 십자가 자체가 무슨 드라큘라를 쫓아내는 것 같은 힘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셨기 때문임을 말씀한다.

고전 1:18은 십자가 자체에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씀한다.  ‘구원을 받는’은 현재진행형 동사이다.  즉 지금 구원을 받고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인데,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옛 사람을 계속 벗어버리지 ( 3:9) 않으면 구원받고 있는 것이 아님을 말씀한다.

주님, 구레네 사람 시몬이 주님을 대신해 십자가를 진 것을 읽습니다.  그는 자신의 십자가를 지기 전 주님의 십자가를 체험했음을 봅니다.  그리고 그 사건으로 평생 그는 자신의 십자가를 지었을 것임을 압니다.  주님의 십자가 지심은 이 세상 모든 죄를 무효화 시키는 놀라운 능력임을 주목합니다.  그 죄 없이 함, 죄 사함을 온전히 체험하기 위해 오늘 나의 십자가를 지고 옛 사람을 벗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