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그리스도시다.  주님을 단지 또 하나의 선지자로 알고 또 정치적 왕으로 기대 했던 (19-21) 제자들에게 주님께서는 자신이 그리스도시며 또한 먼저 고난 받아야 할 것을 풀어주셨다.  하지만 그럼에도 제자들은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는데, 오늘 말씀에야 비로소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았다 (31).  주님께서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타고 있지 않더냐?’라고 그들이 서로에게 물었듯이 성경이 계시될 때 주님에 대해 깨달았지만, 정작 그들이 주님을 알아본 것은 주님께서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셨을 때였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을 알기 위해 주님과 더불어 먹음, 즉 친밀한 관계까지 가야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주님께서는 부활하셨지만, 그 부활 사건이 우리에게 체험되기 위해서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그에 대해 배움으로 깨달아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그와 함께 먹음으로 그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교회 ‘출석’을 넘어, 공동체에 ‘소속’됨으로,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 안에서 함께 떡을 뗌'으로 '주님과 하나'되며 '서로가 하나'되는 것이 '복음'의 궁극임을 본다.

재미있는 것은 주님 주신 떡을 받아 먹음으로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았지만, 알아 보자 마자 바로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셨다.  부활은 육의 부활이지만, 주님에 대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육체 혹은 육신으로 오신 분을 넘어 이제 주님을 육신에 따라 알지 않기 위함이다.  이에 대해 고후 5:16은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 말씀한다. 

결국 이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한 것은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 (35)’이었다.  원어는 '떡의 떼어짐 안에'라고 기록하는데, 즉 이것은 '관계'를 의미한다.  더우기 주님 역시 그들에게 나타나 평강을 말씀하신 후 그들에게 구한 것은 ‘먹을 것’이었고,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자 그 앞에서 잡수셨다.  다시 죽지 않을 영원한 몸으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배가 고파 먹을 것을 구했다고 생각하는 것 보다는, 이 ‘먹는 것’이 얼마나 관계에서 중요한 것임을 말씀하는 것 같다. 

3:20에서도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고 말씀한다.  이미 ‘교회’라는 정체성이 있었지만, 그들은 주님과 더욱 깊은 관계, 더욱 친밀한 관계까지 가지 않고, 단지 자신의 재물과 부와 방법과 지혜를 통해 주님을 위해 사역하려 했었다.  하지만 정작 주님은 ‘너와 내가 함께 먹는 것’이 더 중요함을 말씀한다.

주님, 주님을 머리로만 알려하고 추구하려는 것의 한도를 압니다.  다만 주님과 함께 먹기 원합니다.  참 제물 되신 주님을 취하고, 참된 떡이요 음료이신 주님을 먹고 마시기 원합니다.  그럼으로 주님과 하나되고, 형제 자매와도 하나될 수 있음을 봅니다.  복음이 단지 ‘좋은 소리’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생명되고 힘이 되며 실재가 되기 원합니다.  예전 육신으로 오신 주님의 모습을 내 머리에서 지웁니다.  이제 하늘에 좌정하시고 불꽃 같은 눈을 가지시고 많은 물 소리 같은 음성의 주님을 만나고 주님과 하나되기 원합니다.  주께서 축사하시고 떡과 잔을 드시며 우리에게 베푸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