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구약의 내용들은 신약적 관점에서 보면 이미 지나간 것으로 치부될 수도 있다. 오늘 말씀 내용 역시 남유다와 예루살렘의 죄악에 대한 것이고 이에 대한 심판도 예전에 이미 끝났고 그 교훈 역시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이러한 구절들은 현재 시리아의 상황과 더불어 한반도를 떠오르게 한다..)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이루신 죄사함은 무를 수 없고 그 효력 역시 영원하다. 그렇기 때문에 죄사함에 대해 오해할 수 있는데, 과거는 물론이고 현재와 미래의 죄까지 모두 사함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죄 문제로 고민하거나 싸우거나 갈등하거나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분명 죄사함은 단번에 이루셨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는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요한 1서를 비롯한 성경 여러 곳에는 분명히 죄사함을 받았음에도 우리는 죄나 허물을 범할 수 있고 그에 대해 자백함으로 해결받아야 함을 말씀한다. 또 이 해결 받음은 단지 죄책감에서 자유함을 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함이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잘못을 사과하면 관계가 회복되지 않는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이 세상의 모든 죄는 사함 받았다. 그리고 주님을 믿음으로 죄인에서 의인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이것은 ‘법’적인 문제다. 외국에서 미국으로 이민 와서 미국 시민권자가 됐다고 갑자기 영어도 잘하고 미국 문화를 모두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좋은 예인지는 모르겠지만) 죄인이 의인의 신분으로 바뀌었다고 그 모든 삶의 범위에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더 문제가 드러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이것은 법적인 면에서는 해결됐지만, 우리의 기질적인 문제는 날마다 십자가의 적용이 필요하고 내 안에서 그리스도의 어떠하심의 성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죄에 대해 피흘리기까지 싸움으로 대항해야 하고 (히 12:4) 이것은 우리가 이해하는 평안과는 거리가 있는, 매일 계속되는 피곤하고 힘든 싸움이다.
미가는 유다가 받을 심판에 대해 싸잡아 유다와 이스라엘만을 언급하지 않고 가드, 베들레아브라, 사빌, 사아난, 벧에셀, 마롯, 라기스, 가드모레셋, 악십, 마레사 등 여러 지명을 거한다. 주님께서 주신 죄사함은 인류의 근본적인 죄와 각 사람의 모든 죄들에 대해 자유하게 하셨지만, 이러한 각 죄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싸잡아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임을 오늘 아침에 깨닫는다.
주님, 귀찮고 힘들어서 나의 부족하고 죄악된 면들을 그냥 ‘주님의 이름으로!’ 하기 보다는 내 말 하는 면, 내 생각하는 면, 나의 선호하는 것들, 나의 시간을 주님으로부터 뺏는 요소들, 내가 주님 외에 바라보는 것들, 내가 즐기려 하는 것들, 내가 아직도 내려놓지 못하는 숨겨진 것들 등을 주님 앞에 가지고 나옵니다. 주님의 다루심이 필요합니다. 믿음을 새롭게 하소서.
왕들이 세번 바뀌는 격변의 시대 가운데 부름 받았던 선지자 미가. 그 내용은 첫 장부터 심판과 보응의 말씀이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주권과 그 의로우심, 그리고 죄와는 결코 함께 할 수 없으심을 분명히 하시고, 궁극적으로는 그 사랑을 발견하게 한다.
심판은 심판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바른 길로 인도하고 죄를 없이 하기 위함이다. 히 12:8 에는 “징계 (혹은 훈육 discipline)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고 말씀하는데, 가끔 고난을 받으며 혹은 어려운 일을 당하며 정신이 든다.
나는 결코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멸망할 수 밖에 없지만 오직 주님의 은혜로 건짐받고 용서받은 사람임을 다시 깨닫는다. 음부에까지 추락한 인생을 하늘에까지 올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