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백성들의 악행에 대해 하나님은 답답해 하고 마음 아파 하시며 ‘따져보자’고 말씀한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것은 은혜를 베푸신 것 밖에는 없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다. 결국 국가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여러 문제들이 발생한다.
미가는 하나님의 마음을 독백 형식으로 말하는데, 여호와께서는 제물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사람의 장자를 드리거나 몸의 열매 (아마도 인간의 열심?)를 드리는 것도 기뻐하지 않으신다. 다만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내)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을 요구하시면 받으신다.
5절의 ‘공의’는 히브리어로 복수 명사인데 ‘하나님의 공의로 행하심’을 의미하지만, 결국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말씀한다. 그런데 8절의 ‘정의’는 조금 다른 단어로 ‘의, 심판, 바로 섬’ 등을 의미하고 이러한 것의 ‘행함 (정의를 행하며)’을 말씀한다. 이러한 ‘정의’는 결국 하나님의 ‘공의’에서 오는데, ‘의’는 기준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율법이 기준이 되었지만, 이제는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 즉 믿음에 의한 의가 기준이 된다. 이 믿음에 의한 의는 율법의 기준을 뛰어 넘는 높은 것이다. ‘지키는 행위’에만 초점을 두지 않고 ‘믿음’ 즉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지속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인자’는 하나님의 자비 혹은 은혜라고 해설은 말하는데, 그 본 의미는 ‘언약적인 충성’이라는 의미를 포함한다. 즉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은혜는 무조건적이고, 그 근본은 그가 그의 백성과 맺으신 언약이다. 이러한 언약을 사랑하라고 말씀한다. 사랑은 아끼고 귀히 여기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을 나는 사랑하고 있는가? 그것을 귀히 여기고 있는가?
이러한 것을 위해서는 ‘겸손하게 네 (내) 하나님과 함께 행’해야 하는데,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나중에 오지만 실은 가장 먼저 요구된다. 하나님과 함께 행함이 없다면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겸손히’ 라는 말인데,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말은 매우 영광스럽고 폼나는 일이 될 수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고 오히려 ‘겸손히’ 하라고 한다. 사실 하나님과 동행하면 그 분의 어떠하심 앞에 겸손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분의 영광에 비해 나는 극히 죄스럽고 더럽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행’은 ‘함께 걷는다’는 의미지만 현실에서는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다. 먼저 주님의 왕국과 그 분의 의를 추구하는 것이다.
주님, 나의 마음과 생각을 주장하소서. 주님과 동행함을 사랑하게 하소서. 새로운 마음을 주신다고 하신 약속을 붙잡습니다. 오늘 겸손히 주를 따름으로 믿음에 의한 의 안에 거하며 주의 언약을 사랑함으로 다른 이들에게도 자비를 베풀 수 있게 하소서. 주님 도우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