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고핫 자손은 물론이고 게르손과 므라리 자손 역시 그 봉사의 자격을 30세에서 50세로 획일화했다.  개인의 인격과 취향을 존중하는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획일적인 나이 제한은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지만 사실은 오히려 보호하는 측면이 강하다.  30세까지는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마도 사람들은 그 봉사의 일을 기다리며 준비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50이 가까와 오면 더 이상 봉사할 수 없음을 알고 아쉬워하지 않았을까?

 

현대사회에서 획일적인 것들은 환영받지 못한다.  근대주의적 혹은 제국주의적 발상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수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많은 것에서 획일성은 쉽게 피할 수 없다.  그런데 과연 교회에서도 이러한 획일성이 필요할까?

 

신약에서는 획일성 보다는 하나됨을 강조한다.  획일성과는 반대되는 개념의 ‘각 사람’이라는 말을 신약에서 찾아 보니 매우 많은데, 대표적으로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 2:45)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 ( 1:9)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 2:3)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 20:31)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고전 3:13)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고전 4:5)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고전 7:17)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고전 12:11)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 4:6)’ 등이 있다.

 

성도의 교제는 대중을 상대하는 것이 하니라 나와 동일하게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대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됨’ 혹은 ‘한마음’이 중요한데, 삼위의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이시고, 아버지와 주님께서 하나이심 같이 주님께서 우리로 주님과 하나되게 하시며 우리도 서로 하나되게 하신다 ( 17:11, 21-23).  그래서 한마음의 기준은 내가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4:13은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라고 기록하는데, 인생의 목표인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는 것이 필요하고 이로써 온전한 사람을 이룰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르는 것은 결코 나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12:16은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그리고 빌 2:2은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라고 명령하는데, 어쩌보면 획일적인 것으로 오해될 수 있다.  그래서 교회의 리더십에 순종하고 따라야 하는 것으로 들릴 수 있지만 (물론 벧전 5:5의 장로들에게 순종하는 현실적으로 필요한 면은 분명 있지만), 교회 안의 순종은 먼저 주님께 하고, 성도간의 순종은 ‘피차’간에 하는 것이다.  5:21은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고 말씀하는데, 주님께 순종함으로 결국에는 피차 복종하게 되는 것이다.  획일은 구약의 산물이지만, 하나됨은 신과 인간 그리고 사람 대 사람과의 관계에서 요구된다.

 

주님, 아버지와 주님께서 하나시듯이, 우리도 주님과 온전히 하나되는 때를 기다립니다.  나의 마음과 생각은 수도 없이 갈리지만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함을 배우게 하소서.  한 영혼을 귀히 여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