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절은 ‘그들이 할 일과 짐을 메는 일을 따라 모세에게 계수되었으되..’라고 기록하는데, 이 기록만 보면 마치 일의 양을 먼저 파악하고 거기에 따라 필요한 일꾼의 수를 맞춘 것으로 들릴 수 있다. 하지만 고핫 게르손 므라리 각 자손에서 택함 받은 남자들의 수는 일의 양과 필요에 따라 정해진 것이 아니라 지난 3절에 ‘곧 삼십 세 이상으로 오십 세까지 회막의 일을 하기 위하여 그 역사에 참가할 만한 모든 자를 계수’한 것으로 나온다. 즉 필요에 따라 인원을 충당한 것이 아니라 봉사할 수 있는 자들은 모두 소집하고 일을 맡겼다.
그러다 보니 총 8,580명이나 되었는데, 회막 각 부분과 성물 등을 아무리 모아놔도 할 일이 그렇게나 많을 것 같지는 않아보인다. 마치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적인 기준에 의한 일의 편성 같아 보이기도 한다. 정말 이렇게 많은 이들이 필요했을까?
이들 모두가 동시에 한꺼번에 ‘회막 봉사와 메는 일에 참여 (47절)’했을 것 같진 않다. 아마도 돌아가며 했을 것이고,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여유분의 인원을 보유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의 봉사가 ‘회막’과 성물 취급, 즉 매우 거룩한 것이라는 점이다. 하나님께서 성막을 움직이려고 하셔도 이들이 없이는 움직일 수 없다. 그래서 지난 18절은 ‘너희는 고핫 족속의 지파를 레위인 중에서 끊어지게 하지 말지니’ 라고 말씀한다.
신학교들이 난립하고 검증되지 않은 목회자들이 많이 배출된다고 우려하던 때도 이미 오래 되었다. 문제는 목사 안수를 받고 목회를 시작하면서 많은 이들은 큰 부흥을 꿈 꾼다는 것인데, 그러한 ‘부흥’은 그리 흔한 것은 아니다. 선교를 나가는 것이 아니라면, 전도 대상자들의 수는 정해져 있고, 예전처럼 숫적 부흥을 기대하기는 힘들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목사들이 일자리를 찾지 못하게 되어버렸는데, 이분들은 어떻게 해야할까?
오늘 말씀에 가장 많이 등장한 ‘봉사’라는 단어에서 그 해답을 찾아 본다. 엡 4:12은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말씀하는데, 11절은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라고, 또 13절은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라고 기록한다.
교회에는 여러 직분이 존재하고 각자의 기능은 (원래 소명이라고 썼었다, 하지만 부르심은 같다) 다르지만 하나님이 교회에 주신 각 직분 그 존재의 목적은 ‘성도들을 섬기는 일 안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도록 구비하기 위함’이다. 그렇게 될 때 13절의 궁극적 목적을 이룬다.
서로 섬기는 일이라면 사람의 숫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일반적인 목회를 하지 않아도 ‘성도들을 섬기는 일 안으로’의 봉사라면 8,580명 이상도 문제없다. 서로 짐을 나눠지며 용기를 북돋아 주어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때문이다.
주님, 이 시대에 주님의 뜻을 따라 살려는 많은 주의 종들을 보살펴 주시고, 좁은 문으로 들어감으로 십자가의 메신저가 될 수 있도록 이끄소서. 나의 눈은 항상 주님 외에 다른 곳을 바라 보려고 합니다. 이 섬기는 길에 서로 용기와 기쁨이 되도록 우리를 세우소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오늘도 세워지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