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실인이 처음 등장한다. 민수기에서 나실인이 언급되는 것은 흥미로운데, 각 지파의 책임과 기능을 말하면서 이 특이한 나실인에 대해서도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여호와를 섬기는 것은 오직 레위 지파에게만 허락되었지만 나실인은 남녀를 막론하고 본인이 자발적으로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릴 수 있도록 허락된 길이다.
'나실인'이라는 단어는 여기 민수기 6장과 삼손의 이야기를 다루는 사사기 그리고 아모스 2장 11-12절에만 등장하지만, 나실인에 대해서는 성경 여러 곳에서 등장한다. 예를 들어 한나가 기도해서 얻은 사무엘 역시 나실인이었다. 킹제임스역에서는 애가에도 '나실인'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예레미야애가 4:7 ‘전에는 존귀한 자들의 몸이 눈보다...’ 부분에서 Nazarites 을 ‘존귀한 자들’이라고 번역했다. 즉 그들은 세속에서 벗어나 온전히 주님을 섬김으로 존귀하게 된 자들이다.
예전 나눔에서 나실인에 대해 이미 나누었기 때문에 오늘은 나실인의 섬김과 그 효력에 대해 나누고 싶다. 나실인으로서 섬기는 것은 ‘여호와를 섬기는 것’ 외에도 그가 ‘여호와께 거룩한 자’가 되는 것이다 (8절). 즉 이미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거룩한 정체성은 있지만 그 중에서도 더욱 거룩한 자가 되고 또한 ‘존귀한 자들’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말해 ‘자발적’인 것 즉 스스로 하나님 앞에 거룩함을 취하는 것이다.
그런데 혹시라도 3-7절의 세가지 나실인의 규율을 지키지 못했을 때는 서원했던 날 수를 다시 시작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지나간 기간은 무효’가 되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무효’가 된다는 점이 의아하다. 그만큼 섬겼으면 됐지 그 서원한 기간을 채우는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한 것일까? 실수로 기간을 채우지 못했더라도 그만큼의 섬김은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것 아닐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지난 기간을 인정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한다.
이것은 두 가지 면에서 교훈을 주는데, 아무리 주님을 섬긴다 해도 혹시 실족한다면 그 이전 섬김은 주님 앞에서 무효 즉 인정받지 못함을 말해준다. 그럴 경우 ‘여호와께 드릴 날을 새로 정하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 동시에 이 ‘무효’라는 말에는 ‘영원’에 대한 소망도 있음을 본다. 광야에서 살다가 죽는 삶이라면 섬기든 아니든 무효가 되는 것이 무슨 상관일까? 하지만 이것이 무효가 되는 점이 안타까운 것은 그 효력이 영원에 이를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주님께서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리셨는데, ‘나사렛’이라는 말이 ‘나실인’과 비슷하게 들린다. 레위 지파가 아니어도 참되고 영원하신 대제사장이신 주님은 이러한 참된 나실인의 모습을 보여주시기 때문이다. 그의 섬김은 영원한 효력은 갖는다.
지난 누가복음 큐티 때 22:18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라는 말씀을 기억하는데, 이 부분이 나실인에 대한 언급을 암시하는 것도 같다. 주님은 그의 나라를 이 땅에 온전히 이루시기 까지 다시 나실인의 모습을 취하시며 그의 교회 역시 이러한 모습을 취하기 원하신다.
주님, 나실인으로 자신을 드려도 실족함으로 무효가 될 수 있음을 배웁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호와께 드릴 날을 새로 정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음을 인해 감사드립니다. 실족한 주의 종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이 겸비함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주 앞에 새롭게 드릴 수 있도록 인도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