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절은 ‘이는 곧 서원한 나실인.. 법이며 이외에도 … 할 것이니라’고 한다.  ‘나실인의 법’이라는 말이 13절에도 나오는데, 나실인의 실행은 자신의 몸을 드린다고 아무렇게나 하는 것이 아니라 따라야 하는 법을 통해 이루어지고, 그 결말은 번제, 속죄제, 화목제, 관제 그리고 소제 전제 요제 등등 여러 제사를 드림으로 끝난다. 

물론 여기에는 제사장의 도움이 필요하고 그러한 절차 후에 나실인은 포도주를 마실 수 있게 되어 그의 평범한 삶으로 돌아오는데, ‘이외에도’ 라는 말이 흥미롭다.  물론 ‘힘이 미치는 대로’ 또 ‘그가 서원한 대로’  여러 제사 외에 더하라는 말씀이지만, ‘그 후에도’ 라는 말로도 들린다.  즉 나실인의 서원한 기간이 끝났다고 포도주를 마시며 삶에 취해 살라는 것이 아니라, 포도주를 다시 마실 수 있는 즉 평범한 생활의 기쁨을 누릴 수는 있지만 거기에 취하지 않고 계속해서 성별한 삶을 살라는 말씀으로 들린다.

그러다 보니 갑자기 나실인의 의도가 궁금하다.  나실인으로 살고자 서원한 사람들은 왜 하필 그런 결정을 했을까?  이 ‘나실인의 법’이 간단하지도 않은데 왜 이렇게 힘든 삶을 살려고 결정했을까?  나실인의 서원 기간 동안 생활 자체도 힘들었겠지만 그 후에 평범한 사람으로서 여호와께 구별된 삶을 사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힘든 일이다.  거룩함을 추구하려는 마음에서 시작했을 수도 있겠지만 아마도 대게 나실인으로 서원하는 이들은 일반적인 제사보다 더 깊은 영적 누림을 원했는지 모르겠고, 이것은 결국 그의 죄성을 깨달은 결과다.  그래서 나실인의 기간이 끝난 후에 기본적으로 번제, 속죄제, 화목제, 관제 등을 몰아서 드린다

자신의 삶을 모두 드려 불살랐지만, 그럼에도 결국 나는 나의 죄 때문에 내 자신의 노력과 헌신은 하나님 앞에 상달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하며, 그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와 화목하고, 그로 인해 진정 부어지는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하게 한다. 

이것을 현실에서 계속 이어지게 하는 것은 또한 요제같다.  제사장 앞에 또 사람들 앞에 그리고 궁극적으로 하나님 앞에 계속 흔들어 보이며 증거하는 실행은 죄성과 싸워 이기는 길이다.

사실 ‘거룩’과 ‘평범’은 반대말이다.  평범한 사람이 매우 특별한 나실인의 법을 따라 서원하여 자신의 몸을 구별한 삶을 살다가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올 때 그는 겉으로 볼 때는 방금 머리를 밀은 외모 외에는 지극히 평범해 보이지만, 그의 평범한 일상은 이제 거룩으로 이어진다.  이것을 깨닫고 실천하는 것이 아마도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의 비밀이 아닐까?

주님, 평범하게 보이는 삶을 살지만 주님을 믿고 따르기에 우리의 삶이 결코 평범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오늘도 하나님 앞에 흔들어 보일 것이 있게 하소서.  나의 참된 제물은 오직 그리스도 뿐이심을 고백합니다.  그리스도를 흔듭니다.  그 생명이 나의 생각과 마음과 말에 미치소서.  평범함을 거룩으로 바꾸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