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흘림 없이 죄사함이 없듯이 기름부음 없이 거룩하게 됨이 없다. 구별하여 장막을 세우고 기구와 제단과 기물이 마련되어도 기름을 바르지 않으면 그 성별 (sanctification 혹은 consecration)이 갖추어지지 않는다. 이 기름부음은 앞으로 쓰여질, 즉 사역과 기능을 위함인데, 이를 위해 또한 지휘관들은 헌물을 드린다. 그리고 헌물은 그 쓰임에 맞게 배치가 된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죄사함을 위한 피흘림의 요구는 영단번에 충족되었고, 성령께서 부어지심으로 모든 믿는 이들의 성별됨이 구비되었다. 이제 믿지 않는 것이 죄요 (요 16:9), 믿을 때 성령을 받는다 (행 19:2).
그런데 민수기는 광야 생활에 대한 내용이다. 그 어떤 다른 문화와도 동떨어져 다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인도함 받던 시기였다. 물론 애굽의 옛 생활 방식과 가치관을 그대로 가져나오기는 했겠지만 광야 생활을 하면서 처음 세대는 모두 죽어 나가고 새로운 세대만이 약속하신 땅에 들어간다. 역사적으로 보면 그 당시 다른 지역에서는 여러 문화가 꽃 피는 시기였을 수 있다. 화려하게 보이는 많은 유적들이 세워지고 있던 같은 시기에, 이스라엘 민족은 고작 광야라는 우물안 같은 환경 속에서 그들만의 자그마한 실행들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들의 섬김에 기쁨이 있었을까? 헌물은 자발적인 실행이었을까? (물론 자발적인 것과 독단 independence, autonomy와는 다른 것이다) 다른 문화와 세계와는 철저히 고립된 가운데 우물안 개구리 같은 자부심을 갖고 있지는 않았을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당시 여러 민족과 문화가 번성했지만 그 가운데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임재하심은 이 광야를 헤매는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있었다는 것이다. 유리하는 것 처럼 보이지만 주님의 인도하심과 임재가 있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하시는 것은 다른 민족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그들에게 큰 자부심이었다.
주님, 나의 삶 속에 그렇다할 성공도 없고 자랑할만한 것도 없고, 더우기 변화는 너무 더딥니다. 주님의 말씀이라는 테두리 안에 갇혀 (?) 혹시 다른 것은 보지 못하지는 않나, 시대에는 뒤떨어지지 않나 하는 의구심도 들지만, 생각해 보면 주님의 말씀과 그 임재에 정말 온전히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직 주님 한 분 만으로, 그 하나님의 왕국의 가치를 발견함으로, 그 어떤 것에도 꿀리지 않는 당당함을 새롭게 하소서. 우물안의 개구리라도 주님의 임재하심만 있다면, 또 주님을 품는다면 온 우주보다 큰 주님의 어떠하심을 누릴 수 있음을 발견하게 하소서. 주의 임재의 영광을 보며, 주님의 은혜로 자발적인 실행이 있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