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생활 중에 가장 힘든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올바로 듣고 순종하는 것이겠다.  주님의 생명과 힘으로 채워지고 그 안에서 안식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지만 그것을 위해서도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하기에 사실 신앙 생활은 듣는 것이 전부라고 할 수 있는데, 문제는 그 음성을 올바로 들을 수 있느냐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방법에 대한 책도 여럿 나와 있지만 정작 어떤 이슈에 대해 공동체 차원에서 한 목소리를 내는 것은 쉽지 않게 보인다.  만약 다른 음성을 듣는다면 하나님의 음성 혹은 명령이 아닌 것인데, 한 분 하나님은 한 명령을 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광야 생활에서의 획일적인 면 만이 아니라 하나됨 즉 공동체 생활에 근거한 문제다.

광야에서 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가시적으로 분명하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는데 바로 성막 위의 구름이다.  하나님의 임재, 쉐키나의 영광을 보이는 이 구름은 사막의 작렬하는 태양으로부터 보호했을 뿐만 아니라 때에 따라 움직임으로 이동할 때를 알려 주었기 때문에 더 이상 다른 해설이나 표적이 필요 없었다.  동일하신 하나님은 지금 어떠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실까?  마음을 같이하는 것( 12:16, 고후 13:11, 2:2, 벧전 3:8)이 필요하다.

구름의 움직임에 따라 이스라엘 민족은 이동 혹은 정지 했는데, 이방인들이 외부에서 혹시 이런 모습을 봤다면 뭐라 했을까?  ‘쟤네 또 움직이네?  왜 저렇게 움직이다 서다 하지?’ 라고 궁금해 하거나 비웃었을 것이다.  약속의 땅으로 곧바로 가지도 못하고 계속해서 광야에서 ‘방황’하는 것 처럼 보인다. 

왜 이러한 이동이 필요했을까?  광야이기 때문에 짐승들을 위한 초지를 따라 움직인 것 같지도 않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계속되는 이동을 통해 그들은 광야에서 안주할 이들이 아닌, 즉 유목민으로서의 정체성이 아니라 언젠가는 약속하신 땅으로 들어갈 것임을 깨우쳤을 것이고, 속된 말로 이러한 ‘뺑뺑이’를 통해 그들의 죄성이 가득한 기질은 다루심 받았을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내주하시는 은혜 시대에도 이 땅에서의 삶은 광야 생활을 닮은 것이 있는데, 죄로 가득한 기질은 나의 바람과 의지를 통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이끄심을 통해 변화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요 3:8에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고 말씀하셨다. 

신앙 생활은 안주하는 생활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임의로 이동하는 생활이다.   요즘은 일반적으로 한 사람이 사는 동안 평균적으로 4-5번 직업을 바꾼다고 하는데, 동일한 직업이나 비지니스에 계속 종사한다 해도 우리에게 임재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언제든 움직이는, 움직일 수 있는 생활이 신앙 생활이다.  안식은 있지만 안주는 없다.  참된 안주는 육신의 장막을 벗고 새롭고 영원한 몸으로 갈아 입을 때 얻게된다.

주님, 오늘도 이끄시는 주님을 따르기 원하고 주의 음성에 순종하기 원합니다.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이끄심 안에 있게 하소서.  주님의 교회가, 내가 속한 공동체가 함께 움직이며 한 소리를 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