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나 지금이나 금속을 다루는 법에는 몇 가지가 있는데, 오늘 말씀처럼 ‘두들겨’ 만들 수도 있고, ‘부어’ 만들 수도 있고, ‘붙여’ 만들 수도 있다. 그런데 광야에서는 금이나 은으로 계속 ‘쳐서’ 혹은 ‘두들겨’ 만들라고 여호와 하나님은 명하신다. 아무래도 광야에서는 땔감을 얻기 힘들기 때문에 ‘부어’ 만들기에는 한계가 있고, ‘붙여’ 만드는 것은 내구성이 떨어진다. 킹제임스역에서는 ‘두들겨’라는 말 대신에 ‘한 덩어리를 가지고 만들지니’ 라고 했는데, NIV에서는 ‘hammered’ 라고 되어 있다. 한 덩어리를 쳐서 혹은 두들겨 만드는 것이기에 같은 의미이다.
금에 대해 은은 상대적인 개념이 되는데, 금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상징한다면 은은 그의 백성의 순수함을 나타내는 것 같다. 그런데 ‘한 덩이’의 은을 ‘두들겨’ 만든다. 즉 하나님의 백성은 근본적으로 하나 혹은 한 덩이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무언가 쓸만한 것이 나오기 위해서는 ‘두들김’이 필요하다. 그냥 한 덩어리로 있으면 그 정체성은 은이지만 하나님 앞에 쓰임받을 수 없다. 어떠한 두들김을 감내해야 작품이 나온다.
이렇게 두들겨서 나팔을 두 개 만드는데, ‘한 덩어리’면 되지 왜 둘이 필요했을까? 보통 둘이라는 수는 ‘증거’ 혹은 ‘증인’을 의미한다. 그래서 소리만 내기 위해서라면 나팔을 하나만 만들어도 충분했겠지만 보다 다양한 소리 그리고 더 큰 소리를 내기 위해서 둘이 필요하다. 3절에는 ‘나팔 두 개’를 부는 것은 회중을 소집하는 신호이고, 4절 ‘하나만’ 부는 것은 ‘천부장 된 지휘관들’을 소집하는 것, 5절에는 ‘크게’ 부는 것이라고 번역됐지만 킹제임스나 NASB에서는 ‘알람’으로 되어 있다. 즉 하나의 나팔로는 경종의 소리를 낼 수 없지만 아마도 두개를 번갈아 가며 크게 불 때 알람의 의미가 되는 것 같다. 그래서 5절의 크게 불 때’는 ‘동쪽 진영들이 행진’하고, 6절의 ‘두 번째로 크게 불때에는’ ‘남쪽 진영들이 행진’해야 함을 말씀한다. 이 ‘알람’은 전쟁에 나갈 때도 분다 (9절). 마지막으로 나팔을 불 때는 절기와 매달 첫 날, 그리고 제사를 드릴 때이다 (10절).
나팔은 두 개지만 동일한 소리를 낸다. 증거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분명한 소리를 내어야 한다 (고전 14:8). 이 시대에 세상에 대해 그리고 주님의 백성에 대해 분명한 증거로 크게 알람을 울릴 두 개의 쳐서 만든 나팔이 필요하다. 안주하지 않고 고통을 감내함으로 불어 소리낼 수 있게 만들어진 증인들이 필요하다. 그들의 분명한 경고를 통해 소집되고 행진하며 싸우고 예배한다.
주님, 분명한 한 큰 소리를 낼 수 있는 증인들을 세우소서. 시원한 나팔 소리가 주의 백성 가운데 울려 퍼지게 하소서. 그 나팔 소리를 들으며 주의 백성들이 주님 맞을 준비가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