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장에는 둘째 해 첫째 달 십사일에 유월절을 지키고 시체를 만져 부정하게 된 이들은 둘째 달 십사일에 유월절을 지키도록 허락했다.  이렇게 모든 이들이 유월절에 참여하고 난 후에 오늘 말씀에는 둘째 달 스무날에 드디어 처음으로 구름이 움직이며 증거의 성막이 이동을 한다.  아무리 이 이동에 참가하기 원해도 유월절을 지나지 않고는 그 자격이 없다.  아무리 교회에 등록을 해도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다면 의미가 없다.  그리스도인의 여정은 유월절을 기점으로 시작된다.   교회는 주님의 죽으심을 통해 시작되기 때문이다.  각 지파가 순서대로 이동을 하고 삼일 후에 구름의 인도를 따라 새로운 야영지가 정해지고 성막이 세워지며 성물들이 채워진다.  

궁금한 것은 모세가 그의 처남인 호밥에게 동행을 구했다는 점이다.  엄밀히 그는 이방인이었고 그가 어떻게 거기까지 모세와 함께 했는지도 모르겠지만 (장인 이드로 혹은 르우엘도 출 18:27에는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당시 광야에 있던 12지파 사람들 외에도 애굽에서 타 민족이 함께 나왔거나 도중에 합류한 이방인들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굳이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호밥에게 모세가 남아있기를 권했던 이유는 광야에서 진 치는 것에 대한 도움이라고 기록한다.  몇몇 번역에서는 ‘어디에 진 칠지’로 혹은 ‘어떻게 진 칠지’로 번역했는데, 분명 구름을 통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기에 어디로 갈지는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 진 칠지’ 역시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을텐데 모세는 호밥에게 함께 하기를 청한다.

이것을 보면 모세는 호밥의 ‘기능성’ 때문에 그에게 동행을 청하지는 않은 것 같다.  속된 말로 ‘써먹기’ 위해 호밥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결국 모세가 원했던 것은 이방인 호밥도 ‘여호와의 복 (29, 32)’을 받고 누리며 그 복에 동참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남기 원했던 것이다.  호밥이 30절에 ‘나는 가지 아니하고 내 고향 내 친족에게로 가리라’고 한 말은 룻이 나오미에게 한 말과는 상반되는 말이다.  호밥의 입장에서 보면 광야에서 헤매고 있는 그 현장이 달갑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지만, 모세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복을 말하며 함께 하기를 권한다.

주님, 주님의 영원한 복을 다시 묵상하기 원합니다.  과거 자신의 삶터와 모습으로 되돌아가려 했던 호밥에게 모세는 주의 복을 증거했던 것을 봅니다.  여호와의 사심을 다시 알고 묵상하기 원합니다.  그 영광 안으로 우리를 이끄셔서 세상의 그 어떠한 것도 여호와를 아는 복에는 미치지 못함을 누리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