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에는 두 가지 만족이 나오고 그 이면의 두 가지 관점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두 가지 사랑이 나온다.  고기를 먹고 싶다고 투정하는 백성에게 메추라기를 보내셔서 먹이신 하나님께서 백성 중 몇을 죽이시는 말씀의 내용만을 본다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익숙한 구절이 어색하게 들린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사랑이신 하나님을 만나고 그리스도의 어떠함을 발견하며 참된 만족이 무엇인지 발견해야 한다.

여호와의 영이 백성의 장로 칠십 인에게 임하시자 그들이 모두 예언했다.  그 예언의 내용은 기록되지 않지만 흥미롭게도 그 중 두 명의 이름이 기록된다.  더우기 그들은 모세의 명을 어기고 진영에 머물러 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엘닷과 메닷이었는데, 이들의 이름은 여기 외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엘닷이라는 이름에서 ‘엘’은 하나님을 뜻하고 ‘닷’이라는 말은 ‘사랑’과 관계가 있다고 한다 (‘아버지의 형제’ 라는 의미도 있지만).  ‘메닷’은 ‘야다드’라는 히브리어에서 왔는데, 이 역시 사랑이라는 의미이다.  두 가지를 연관지어 보면 ‘하나님 사랑’과 또 다른 하나의 ‘사랑’ 즉 아마도 형제간의 사랑이고 이 둘은 모세의 명을 어기고 진영에 머물렀음에도 동일한 영을 받아 예언했다.  더우기 모세는 이들의 불복종에 대해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이들을 금하려했던 가장 총애하던 여호수아에게 ‘네가 나를 두고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의 영을 그의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29)’라고 답한다.

이 둘은 왜 장막 주위로 오라는 모세의 명을 어겼을까?  그리고 모세는 왜 그들을 용납했을까?  그들의 이름을 바탕으로 추론해 보면 (비약일 수도 있지만), 그들의 삶은 모두 하나님 사랑 그리고 형제 사랑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그들에게 장막은 단순히 상징이었을 수 있다.  그들에게 있어 그들이 있던 진영이 하나님의 장막이었고 하나님의 존전이었으며 그들이 있는 그곳에서 그들은 예배하며 하나님을 만나고 여호와의 영의 임재하심을 누릴 수 있었다.

이러한 이들에게 동일한 영이 임하시자 모세는 만족했고, 더우기 모든 백성들이 그들처럼 다 선지자 (prophet, 말하는 사람) 되기 원했다.  하지만 여호수아는 제도적인 문제, 질서나 권위 혹은 명령체계에 문제가 생길 것 같아 만족할 수 없었다.

백성들 역시 만족하지 못했는데 그들은 영적인 만족 보다는 육적인 만족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사실 매일 만나라는 동일한 음식을 먹는 것은 피곤한 일이었을 것이다.  광야 가운데 오락이나 소일 거리도 별로 없었을 것이고 거기에 먹는 것은 만나 하나로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한 그들이 고기를 원하고 전에 먹던 여러 음식을 그리워 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것 아닌가..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 중 몇에 대해 진노를 발하심으로 치신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광야 생활을 하게 하신 것은 열악한 가운데서도 어떻든 인생을 재미있게 즐기는 법을 터득하라는 뜻은 아니었다.  그들은 약속의 땅을 목적으로 나아가는 여정에 있었고 이를 위해 그들의 기질은 다루심 받아야 했다.  예전에 즐기던 것에 대한 만족을 내려놓고 오직 주님으로만 만족함을 배워야 했다.  하나님의 백성의 삶은 거룩해야 하며 세상 것으로 만족하는 것에 대해 십자가를 적용는 것을 배워야 한다.   단지 기본적인 먹을 것과 입을 것에 대해 만족 (딤전 6:8) 할 줄 알아야 하고, 현재 가진 것들로 만족해야 한다 ( 13:5).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 ( 12:15)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물질적 부가 아니라 서로 나눌 때 풍성함, 그리고 생명의 풍성함이기 때문이다 ( 10:10).  이는 우리의 관점이 영에 있느냐 혹은 육에 있는냐에 따른다 ( 8:5-6).

주님, 이러한 나눔을 하고 있지만 제 안에도 주님으로만 만족하기 보다는 세상의 것을 추구하는 것이 더 많음을 고백합니다.  이러한 육에 속한 것들을 소멸하소서.  심판하시고 치소서.  이에 대한 답은 십자가임을 압니다.  주님을 따르며 주님으로만 만족하는 것은 고난의 길, 갈등의 길이며 어쩌면 세상적인 관점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길임을 봅니다.  하지만 그냥 참고 인내만 하며 가는 길이 아니라, 그 안에서 참된 만족을 누릴 수 있도록 주의 임재를 주소서.  내가 영을 주목할 때 주께서 계심을 알고 누리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