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절은 여호와의 진노하심을 기록한다.  지난 장에는 욕심을 낸 백성들에 대한 진노를 기록하더니 이제는 미리암과 아론에 대한 진노를 기록한다.  이러한 내용만 보면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이라는 말씀이 의아해진다.  마친 조그만 실수에도 화를 내는 전형적인 역기능 가정의 아버지를 보는 듯 오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악행이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던 것은 물론이고 하나님의 진노에는 이유가 있고 목적이 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단지 말 듣지 않는다고 신경질을 부리며 진노하시지는 않는다.  진노 역시 커뮤니케이션의 한 모습이고 때에 따라 매우 효과적인 수단일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진노는 매우 불안정, 불완전하다)  죄에 대해 ‘은혜로’ 덮으려고만 한다면 은혜라는 말이 무색해 지고 방종하게 하지만 진노가 따르고 그로 인해 회개하며 돌아보고 반성할 수 있다면 은혜가 참 은혜되게 한다.  회개 없는 사함 없고 ( 24:47) 사함 받을 때 은혜를 경험한다.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이러한 진노의 결과는 ‘떠나심’이다.  9절은 ‘진노하시고 떠나시매’, 그리고 10절은 ‘구름이 장막 위에서 떠나갔고’ 라고 기록한다.  광야 생활이 가치가 있던 단 하나의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하나님께서 장막 치신 것 즉 하나님의 임재였다.  하지만 아론과 미리암의 죄 때문에 하나님이 백성의 진영을 떠나시고, 모세는 이제 여호와께 ‘부르짖어 (13)’야 했다.

민수기의 상황에서 모세는 여호와의 유일한 종이었다.  하지만 이제 은혜 시대에서 어떤 한 사람만이 그의 백성 가운데 유일한 인물이 될 수 없다.  주님께서 주시는 권위는 분명 있고 그에 순종함이 필요하지만, 모세의 그것과는 차별된다.  그래서 더 이상 순종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 5:21)’고 말씀한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복종하며 서로 교통해야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제 간에 다툼이 생기는 것을 본다.  성경 여러 곳에서는 제자들 간의 다툼, 더우기 바울과 바나바가 심히 다투었던 일, 교회 안에서의 다툼 등을 기록한다 (사실 헬라어로는 모두 다른 단어들이다).  그런데 매우 의미심장한 것은 다툼에 대해서는 ‘서로’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는 점이다.

고전 6:1은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와 더불어 다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고 말씀한다.  다툼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서로’가 아니라 같은 지체 혹은 형제임에도 ‘다른 이 - 헤테로’가 되어 버린다.  다툼은 하나를 깨뜨리고 공동체를 허물으며 결국은 한분이신 하나님의 임재를 잃게 한다.  4:1은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라고 말씀하는데 결국 다툼은 나의 자아가 끝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아직도 내 옛 자아가 살아 있고, 정욕이 살아 있고, 교만이 올라올 때 다툼은 당연하다.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진노하심 중에도 미리암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고 더우기 미리암을 위해 공동체가 함께 했던 점이다.  미리암은 진영 밖에 칠일을 머물러야 했지만 그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은 이동하지 못한다.  미리암의 죄로 인해 공동체가 불편을 겪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한 영혼의 회개를 위해 함께 하는 공동체의 모습을 본다. 

주님, 아침부터 작은 다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회개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주님의 어떠하심, 그리고 그 생명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은혜로 성령을 한량없이 주시기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