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효과적으로 진행시키기 위해 어느 조직이나 리더는 필요하다.  하지만 리더는 그 말 처럼 ‘이끄는’ 사람이다.  자신의 생각과 뜻을 다른 이들에게 강압하고 관철시키는 이는 압제자다.  1, 2절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고, 3절은 ‘모세가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했음을 기록한다.  참된 영적 리더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명하고 권유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삶으로 본을 보이는 이들이다.  본을 보임으로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말씀대로 각 지파에서 한 명씩 발탁되어 가나안 땅으로 정탐을 보내는데, 생명의 삶 해설에는 이 정탐에 대해 신명기 1장에서 믿음이 적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으로 친절히 설명한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당신께서 주시마 약속하신 것에 대해 전혀 문제가 없지만, 믿음 없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뭔가 확증이 필요했다.  하지만 결론은 이미 알고 있는대로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오히려 더 두려워했고 불평했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그리고 현재의 녹록하지 않은 상황 등을 잘 고려하고 분석하는 것이 필요할 때가 분명 있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에 대해서는 분석해 봐야 아낙 자손만 보이고 내 자신의 무력함만 드러나고 40년간 세월만 허송한다.  그 주신 비전은 믿음으로 붙잡고 나아가야 한다 (비전이 확실하다면).  믿음 밖에는 없다.

23절에는 ‘에스골 골짜기’에서 포도송이를 베어 두 명이 막대기에 꿰어 매고 온 것을 기록하는데, 포도송이는 단수이다.  즉 한 송이가 두 명이 매어 들어야만 할 정도로 컸다.  광야에서 만나만 접하다가 이러한 과일들을 보고 그들은 충격 받지 않았을까?  물론 아직 시간적으로는 출애굽한지 그리 오래 되지 않았기 때문에 포도나 무화과 혹은 석류를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24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거기서 포도를 베었으므로 그 곳을 에스골 골짜기라 불렀더라’는 부분이다.  ‘에스골’이라는 말은 창세기에 처음 나오는데 롯이 잡혀갔을 때 아브라함을 따라 싸웠던 아모리 사람의 이름이고,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아모리족이 살았던 헤브론을 지나고 있다.  이 ‘에스골’ 이라고 부른 이유가 ‘포도’에 있다고 하는데, 어원학적으로 에스골의 ‘에’는 히브리어 알파 알레프의 변형이고 그 의미 중 하나는 ‘송이’이며 그래서 ‘에스골’은 ‘포도송이’라는 의미가 된다고 한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에스골’이라고 부르면서 과연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음 부르는 혹은 듣는 이름이라고 생각했을까?  어디서 들어봤던 이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혹 과거 구전되어 오던 아브라함의 용맹이 기억나지 않았을까?  아쉬운 것은 그들은 기억하지 못했던 것 같다.  구전으로 기억하기에는 너무도 하찮아 보이는 이름이었을 수 있다.  이러한 이름들이 나의 옆을 지날 때가 많지만 주의하지 않으면 그냥 ‘포도송이’로 그치고 만다.  하지만 오늘 아침 이 ‘에스골’은 새롭게 다가온다.  구전이 아니라 이러한 민수기가 기록으로 남겨졌기 때문이다.  기록은 정확한 기억을 부른다.  두려워 하고 실패하고 포기했던 과거 여러 사건들에서 부터 이제 주님께서 기록을 통해 우리에게 용기를 주신다

주님, 주의 말씀을 우리의 마음에 각인 시키소서.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육의 마음판에 기록하소서 (고후 3:3).  에스골이라는 말을 통해 과거 주의 도우심과 인도하심, 승리케 하심을 기억하게 하시고, 이제 주의 언약을 붙들고 명령을 따르게 하소서.  보기에는 평범한 하루를 살아가지만 그 가운데에서 주의 약속하신 땅을 취해가는 주의 권속들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