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장에서 백성들을 심판하시고 20세 전 세대와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아무도 좋은 땅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을 말씀하셨던 하나님은 ‘너희는 내가 주어 살게 할 땅에 들어가서… 여호와께 향기롭게 드릴 때에’ 라고 말씀한다 (2, 3).  14 39절은 ‘모세가 이 말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알리매 백성이 크게 슬퍼하여’ 라고 했기 때문에 모든 1세대 이스라엘 자손은 그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을 알았다.  그런데 바로 15장에서는 하나님께서 그 땅에 들어간 후에 어떻게 제사를 드려야 하는지 말씀한다.

이러한 말씀이 1세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로 다가올 수 있었을까?  그들은 이미 심판을 받았고 그들의 ‘시체는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 (14:32)’이다.  과연 그들은 이러한 여호와의 말씀에 소망을 품을 수 있었을까?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지도 못하고 광야에서 고생만 하다가 시체로 소멸될 것인데 말이다.  이러한 면만 보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whimsical (변덕스럽고 괴팍한) God 이라고 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물론 자신들은 망하더라도 다음 세대에 대해 희망을 걸 수도 있었겠다.  하지만 믿음이 이런 식이 된다면 구약의 선민적 구원 사상에 비해 ‘개인적 구원’을 중시하는 신약적 (혹은 어떤 면으로는

 서구적 내지는 현대적?) 신앙에는 큰 걸림돌이 된다.  ‘나는 예수를 믿었지만 요 모양 요 꼴로 신앙 생활을 한다 해도 우리 자식들만큼은 제대로 신앙 생활하게 하겠다’ 는 식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약속대로 주님께서 오셨다.  그들의 백성은 하나님을 떠나고 영접하지 않았지만 약속대로 메시야가 오셨고 죄 사함을 위해 죽으셨다.  '신은 죽었다' 라고 니체가 말했다고 하는데, 이 말이 원래 의미가 다소 왜곡됐다고 한다.  그 원 의미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리고 니체가 신에 대해 다른 언급을 했었는지 모르지만, 그의 말은 당시 기독교적 사회 배경 에서 성장할 수 밖에 없던 그의 사상의 패러다임의 한계를 보여주는것 같다

적어도 그의 말에서 세가지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인데, 첫째 '신은 없다'가 아니라 '죽었다'로 말함으로 그는 신의 존재를 인정한다. 다만 그의 사상 속에서 신은 죽었다.   둘째 본래 신은 불멸의 존재이기에 만약 신이 죽었다면 다시 살 수 있다는 부활 사상도 그는 묵언하에 인정한 것이된다.  셋째 '죽은 신'은 예수시기에 예수의 신성 또한 인정한 것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나 또한 부정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그 부정의 한 이면에는 부인할 수 없는 그 분의 존재를 내가 인정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하나님께서 그 분의 열심으로 역사를 이끌어 오셨다.  가끔 괴팍스럽게 보이는 하나님이라 할찌라도 자신의 놀라운 계획 안에 당신 자신의 죽음을 포함시키신 그 분의 어떠함은 우리로 모든 논쟁 거리에 대해 입 다물게 한다.  그 분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다.

주 예수님,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엎드러졌지만 우리는 주의 은혜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해와 판단으로 소망을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열심으로 이제까지 일하시며 주의 거룩하심으로 우리를 이끄심을 봅니다.  우리 안에서 더욱 역사하소서.  다시 한번 제사를 말씀하시며 우리와 교제하기 원하시는 주님의 아름다우심을 주목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