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에 나무하는 이를 발견했다. 이게 뭐 대수일까 하겠지만 안식일에 뭔가를 한다는 것은 여호와의 명을 어기는 것이고 이는 단순히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비방하는’ 것이고 ‘여호와의 말씀을 멸시하고 그의 명령을 파괴’하는 것이다 (지난 30-31절). 우리가 짓는 죄가 이렇다. 단지 범죄를 저지르거나 혹은 나쁜 짓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전에도 나누었지만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거스려 단지 무언가 했기 때문이 아니라, 안식일은 ‘완성’을 의미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그 완성하심에 무언가를 더하려고 하는 것이고, 이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사역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같은 선상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사에 무언가를 더하려고 하는 것이 정죄되는 것이고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악한 것이다.
이 문제가 엄중한 것이기에 주님께서는 급기야 각 사람의 옷에 술을 만들어 붙이고 거기에 청색 끈을 더하라고 하신다. 이것은 일종의 리마인더인데, 옷은 나의 몸에 항상 있는 것이기에 그 술과 끈을 볼 때 마다 여호와 하나님의 계명을 생각나게 하는 역할을 한다. 기능면에서 본다면 거추장 스럽고 걸리적 거리는 것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항상 여호와의 계명을 기억하기 위해 시간마다 제동 걸리게 한다.
그런데 구글에 찾아보면 요즘에는 이러한 리마인더 기능에서 벗어나 일종의 패션이 된 것을 볼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그를 인정하기 위해 있다.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우리 생각과 마음에서 너무 빨리 잊혀질 수 있기에 그를 기억해야만 한다. 하나님은 그가 어떤 분이신지 계속 말씀하신다.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었느니라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니라 (41절)’.
21세기에 접어들면서 포스트 모던을 넘어 포스트 포스트 모던이라는 말도 회자되는 이 때에 우리 신앙의 모습을 점검한다면 우리 역시 이러한 리마인더가 필요함을 본다. 21세기를 살고 있고 지난 역사를 돌아볼 수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마치 지난 몇 천년을 살았던 것 같은, 또 앞으로 영원히 살 수 있을 거라는 착각을 하게 되지만 우리의 삶은 일시적이고 매우 제한적이다. 그리스도의 생명 없이는 영생이 없고 따라서 미래도 없다. 여호와를 인정해야 한다.
주님, 셀폰으로 알람을 해 놓아도 나의 마음이 주를 향하지 않는다면 그 효능이 없음을 경험합니다. 나의 마음과 생각을 주관하소서. 나의 가정에서 먼저 여호와를 인정하게 하시고 공동체 안에서 유일하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소서.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를 주장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