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조에 대해서는 이제껏 많이 나누었지만 결론적으로 이제 제사장의 구분이 없고 성전이 없는 신약 시대에는 십일조가 필요없다. 십일조를 하려 한다면 구약 여러 다른 율법과 규례도 함께 지켜야 하고 이는 유대교로의 개종을 의미하며 결국 이는 그리스도의 공로를 무시하는 것이 된다. 이스라엘 사람들 조차 지난 2천년 전부터 현재까지도 십일조를 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회막 혹은 성전이 없고 레위인들도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 제3성전이 지어지면 레위인들을 여러 방법을 통해 찾아내게 될 것이고 구약의 여러 것들을 회복하려는 시도와 더불어 십일조 역시 회복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역시 십일조의 원래 방법은 돈이 아니라 곡물이나 제물의 일부인 것을 알아야 하며, 곡물을 아예 수확할 수 없는 민수기의 광야에서는 제물 중에 거제에 대한 십일조만 언급된다.
생명의 삶 해설이 실망스러운 것은 아직도 십일조와 복을 연결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 복은 다른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복을 암시한다. 신정시대였던 광야시대부터 십일조는 세금과 동일했다. 물론 왕정시대로 넘어가면서 추가적으로 세금이 붙지만, 세금이 소득의 십분의 일이면 정말 너무나 가벼운 것이었고 기본적으로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면 십분의 일을 드리는 것은 결코 부담이 될 수 없었다. 미국은 일반적으로 소득의 30% 정도까지 소득세로 내고 있고 나라에 따라 50%까지 내는 곳도 있지만 그에 비하면 이스라엘의 십일조는 매우 가벼웠다.
하지만 신약 시대에 아직도 십일조를 운운한다면 이는 매우 큰 부담이 된다. 구약시대에도 흉년이 들어 소득이 떨어지면 그 십일조 역시 작아지고 어떤 경우는 아예 십일조를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십일조는 복을 받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복을 받은 후에 하는 것이다. 물론 수확이 있음에도 십일조를 하지 않을 때 성전의 섬기는 것이 위협받을 수 있기 때문에 말라기에서는 복과 관련해서 말씀하지만 원래는 창세기 아브라함 때부터 십일조는 먼저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면 바치는 것으로 되어있다. 소위 ‘믿음으로’ 하는 것, 예를 들어 연봉이 100인데 십일조를 50함으로 연봉이 500으로 늘기를 바라며 하는 것이 아니다. 세금으로 여기면 이해가 쉽다. 그렇기 때문에 소득이 적거나 없는 이들은 이 십일조를 바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레위 지파처럼 그 수혜자가 된다.
현대에 와서 교회들이 십일조를 강조하는 이유는 아무래도 교회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재정이 필요하기 때문인데, 성경적인 올바른 가르침 보다는 종교적 열심과 교세확장 그리고 목회자들의 사역비 충당을 위해 십일조를 강조 (간혹 강요) 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물론 현실적으로 재정이 필요하지만 그것을 ‘십일조’라는 명목으로 바치게 한다면 신앙의 본질을 흐리게 하는 매우 심각한 문제다. 그리고 십일조를 거둠으로 밖에 운영을 못하는 교회 운영이라면 운영 형태를 바꾸어야 한다. 재정적으로 많은 부담을 안게 하고 그것을 믿음이라고 정의한다면 술수를 써서 수입을 올리려 하는 무리수를 두게 하고, 결론적으로 바침으로 얻는 것은 감사함이나 믿음의 성장보다는 교만을 싹트게 한다. 교회의 운영을 위해서는 그 운영에 필요한 것을 오픈하고 그 필요에 따라 헌물을 구하면 된다.
물론 십일조를 포함한 모든 헌물과 드림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는 있어야 한다. 헌금을 할 때 세상적인 관점에서는 ‘기부’ 혹은 ‘도네이션’ 같아 보이지만 헌물 혹은 예물이라고 하는 이유는 이러한 예물이 종교 기관이나 사람에게 바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어제 ‘대속’이라는 말에 이어, 내 소유의 일부를 바침을 통해 내 모든 소유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것이고, 따라서 바치지 못하는 물질에 대한 사용 역시
하나님의 뜻 안에서 온전히 거룩하게 사용해야 함을 배운다.
헌물은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고후 9:7). 믿음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다면, 그리고 사역의 필요가 보인다면 그는 분명 그의 지갑을 기꺼이 연다. 또 더 바치고 싶어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문제이고 공동체의 문제이며, 하나님의 권속을 위한 것이며 바칠 때 기쁨을 누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