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은지심’이라는 말은 남의 형편에 대해 불쌍히 여길 줄 아는 마음이라는 뜻이다. 즉 내가 직접 당하는 고통은 아니지만 어려운 일을 당하는 이들에 대해 ‘공감’할 줄 아는 능력이다. 그와 비슷하지만 피해의식을 부르는 건강하지 않은 반응도 있는데, 예를 들어 구약 성경을 읽으며 광야에서 불순종하다가 계속 여호와 하나님의 벌을 받는 이스라엘 민족을 보며 그 상황이 마치 나에게 투영되어 오는 느낌을 받고 우울하게 되는 것이다 (지난 며칠간 이러한 느낌이 나에게 있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어떤 면에서 불쌍한 것 같고 그렇게 자주 벌을 내리시는 하나님은 고약한 분으로 여기는 것이다.
오늘은 이스라엘이 모처럼 승리를 경험한다. 특히 광야 시절 초기 1세 때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고 멋대로 올라가 싸우다 대패한 경험이 있는 호르마에서 이제 차세대는 압승을 거두고 그들을 완전히 섬멸한다. 그런데 이 부분을 읽으며 드는 생각은 여기서는 반대로 가나안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심리학에서는 이러한 반응을 어릴 때 혹은 과거의 상처에서 오는 피해의식과 연관지어 설명한다. 하지만 결국 나의 죄성이고 불완전함 때문이다. 모든 상황의 올바른 해석은 여호와 하나님 편에 있을 때 가능하다.
1절의 ‘네겝’ 지역은 ‘불뱀’으로 유명한 곳이다. 이 불뱀이 어떠한 것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이사야 14:29에는 ‘날아다니는’ 것으로 묘사가 되어 있고, 30:6에는 동일한 네겝 지방에 존재하는 ‘날아다니는 불뱀’으로 묘사된다. 여호와께서 이때만 독특하게 불뱀을 만드셔서 보낸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아니면 정말 ‘날아다니는 불뱀’이라는 것이 당시 그 지역에 실존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민수기에서는 이 불뱀들을 ‘여호와께서 보내신 것으로 기록하는데, 이스라엘의 불평에 대한 체벌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때 만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매우 많은 핍박과 고통을 당해왔다. 지난 2천 년간 국토 없이 유리하다가 결국 2차 대전 때에는 히틀러 아래 수백만 명이 학살 당했는데 이러한 점은 그들이 불쌍하게 느껴지는 동시에 이러한 일을 당하지 않는 현재 나의 삶을 하나님 앞에 감사드리게 한다. 이스라엘의 불행이 결코 나의 행복이 될 수는 없지만 그들의 불순종으로 인해 결과적으로는 나에게 은혜가 미쳤다 (롬 11:30). 하나님은 구원하실 자를 구원하신다 (행 13:48, 엡 1:4).
사람들은 필요 이상 남에 대해 호기심이 많은데, 요 21장에도 베드로가 뜬금없이 요한에 대해 주님께 질문한 것이 나온다. 주님은 이에 대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르라.. (22절)’ 이라고 답하신다. 이스라엘 민족의 일로 내가 투영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를 살리신 그리스도의 은혜이다.
주님, 놋뱀이 장대에 달린 것 처럼 그리스도가 나무에 달려 죽으셨음을 봅니다. 나에게 이러한 그리스도가 있음을 감사합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많은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죽었지만 나는 살려주심을 감사합니다. 이미 3천 5백년 전에 있던 일에 대해 내 자신이 피해의식을 갖는 어리석은 죄성은 버리게 하소서. 과거 나의 상처가 오늘 피해의식으로 나타나지 않도록 주의
구원의 은혜를 더욱 누리기 원합니다. 주님의 은혜 안에서 모든 상처가 주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가 됨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