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 교수인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한국에서 유독 베스트 셀러가 되었는데, 아마도 그 이유는 현대 한국 사회가 심각한 정의의 부재를 경험하고 있고 그래서 정의에 대한 확실한 재고가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들었다. 

예전에 나누었지만 보통 ‘정의’ 라고 하면 사회적인 면에서는 영어로 justice로 이해되고 ‘의’라고 하면 종교적인 개념이며, ‘공의’라고 할 때는 이 둘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자주 인용되는 성경 구절에도 ‘너희는 먼저 그의 왕국과 그의 의를 구하라 ( 6:33)’는 말씀이 있는 것 처럼, 이 ‘정의’의 문제는 오늘을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적어도 세가지 다른 용어 즉 ‘정의’ ‘의’ ‘공의’ 등을 의미하는 헬라어는 단 하나 뿐이라는 것인데 바로 ‘디카이오수네’ 라는 말이다.  헬라어 처럼 어휘가 분명한 말에 ‘의’를 뜻하는 단어가 의외로 하나 뿐이다.  다만 다른 언어로 번역할 때 상황에 따라 ‘정의’ ‘의’ ‘공의’ 등으로 바뀌는 것이다.  왜 세 가지 다른 개념으로 생각할 수 있는 말이 원래는 단 한 단어일까?  정의라는 것은 기준인데, 원래 기준은 단 하나, 한 분 하나님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회 정의를 내세워 동성욕이 인권이라고 외쳐도 그것은 ‘의’ 디카이오수네가 아니다.  먼저 주님의 디카이오수네를 구해야 한다.  '차별'이 아니라 ''의 기준에 의해 그리스도인들은 동성욕 문제를 포함 많은 이슈들에 접근해야 한다.

21장 부터 이스라엘 민족은 계속해서 타민족을 점령해 나간다.  35절은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라고 기록하는데, 이것은 세상적 기준에서는 ‘학살’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사막의 신’이니 어쩌고 하면서 이스라엘을 당시 '평화롭게' 살던 '죄없는' 민족들을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고간 야비한 민족이라고 비난한다.  하지만 당시 상황에 대해 성경의 기록과 역사적 기록 외에는 자세히 알 수 없다.  하나님은 벌하실 민족을 벌하신다.  정의는 진리에서 비롯되고 정의의 기준은 언제나 진리이시고 실재이신 하나님이시다.

주님, 내가 벌을 받고 손해를 보아도 주님의 의를 위하고 그 의에 의한 것이라면 기뻐할 수 있음을 감사합니다.  주님은 공평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동시에 아가페가 충만하신 분이심을 압니다.  디카이오수네와 아가페가 내 삶 속에서 발란스를 이루어 주님의 왕국을 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