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된 인간으로서 거룩하신 하나님 (호 떼오스)의 생각과 뜻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55:9a에는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라고, 11:34에는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라고, 또 고전 2:16a에는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라고 말씀한다.  하지만 롬 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그리고 32절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라는 말씀처럼 적어도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전혀 모를 수도 없다.  관심을 갖는다면 창조된 만물이 증거하고 또 인간의 양심이 증거하기 때문이고, 더우기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 (고전 2:16b)’다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발람은 분명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알았지만 발락이 더 큰 후대로 다가오자 한번 더 하나님께 여쭤보려 한다 (19).  이미 주신 믿음과 이미 받은 말씀이면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유혹이 몰려올 때 하나님 말씀에 더하려고, 혹은 다른 말씀은 없나 찾는다 (19).  이 정도면 도둑질이 아닐 것이다.  이것은 불륜 (혹 음행)이 아닐 것이다.  이것은 신앙과 다른 인권의 문제다.  이것은 현지화의 문제 혹은 문화적인 문제이다.  모든 것에서 완벽할 수는 없다.  등등..

이러한 발람 혹은 이 시대를 사는 발람인 사람들 (나를 포함)에게 하나님은 일단 가는 것을 허락하시지만 결국은 노하신다.  허락해 놓고 노하는 것은 이상하게 생각되지만 기뻐하심으로 허락하는 것이 아니기에 결국은 노하신다.  이에 대해 주님은 이혼의 예를 들며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 19:8)’고 말씀한다.  이것은 이혼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본래는 그렇지 아니’한 것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다.  바울 역시 로마서 1장에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을 ‘내버려 두’셨음을 세 번이나 말씀한다.

하나님을 잊고 떠나 무시할 때 곧 바로 하나님의 노하심이 있는 것은 오히려 복이다.  돌이킬 수 있기 때문이다.  믿음의 연륜만 믿고 내 마음을 지키지 않는다면 나에게도 말하는 나귀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러한 나귀가 있음에도 발람은 아직도 ‘당신이 이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면 나는 돌아가겠나이다’ 라고 말한다.  발람이 하나님께서 이를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을 몰랐을까?  그럼에도 여호와의 사자는 또 허락하신다.  객관적으로 보면 이해가 되지 않고 너무 이상한 전개지만 나의 삶을 돌아보면 이러할 때가 적지 않았음을 본다.  하나님의 뜻을 알아도 여러 이유를 대며 나의 이익을 항상 먼저 계산했다.  하나님만으로 만족한다고 하면서도 사람의 칭찬과 동의를 구하려 했다. 

순간 순간 주님을 따르려고 했지만 동시에 나의 깊은 죄성이 나를 이끌었다.  바울은 이에 대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라고 탄식했다.  영어로는 wretched man이라고 번역했는데 정말 ‘나는 비참하다.  답이 없다!’ 라는 의미이다.  나는 정말 답이 없다.  이러한 비참함이 주의 은혜를 더욱 사모하게 한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 ( 5:20).

주님, 주의 놀라운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흔들릴 때가 적지 않음을 주께서 아십니다.  주님의 약속하심, 놀라운 구원하심, 이 모든 것의 결국을 더 깊이 알게 하소서.  포기하지 말고 유혹과 핍박에 대해 견디는 것만이 아니라, 정복할 수 있는 이기는 자로 성장하게 하소서.  오늘도 주의 은혜는 나의 죄성과 어떠함을 넘어 이기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