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히 노력하고 적당히 죄 안짓고 적당히 착하게 살면서 이생에서는 큰 복 누리기를 기대하고 죽어서는 천당에서 큰 상급을 받기 원한다면, 그리고 만일 적당히 착하게 살았던 보상으로 이생에서 기대한 만큼 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을 원망한다면 그것은 신앙인의 모습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현재 나의 형편에 대해 자족함을 배우게 하지만 동시에 모든 선한 일에 있어 ‘힘써’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막 12:30)’ 죽도록 충성하여 (계2:10)’ ‘모든 일에 절제하’여 (고전 9:25) 행함을 요구한다. 이러한 것은 소위 ‘완벽주의’는 아니더라도 하나님의 온전하심 같이 우리도 온전을 추구해야 함을 의미한다 (마 5:48).
발람의 등장부터 얼마나 발락은 집요하게 이스라엘을 대적하는가.. 계속해서 발람을 부르고 첫번째 저주가 이루어지지 않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보이지 않는 부분으로 자리를 옮겨 다시 일곱 제단을 쌓고 저주를 부탁한다. 내일 범위 27절에도 역시 세번째 저주를 부탁한다. 한 두번 하다가 잘 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으로 생각하고 포기하는 많은 신앙인들에 비해 원수는 얼마나 철저하고 집요한가. 물론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이루지 못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뜻이라도 길이 막힐 때가 있다 (롬 1:13). 사탄이 막을 때도 있고 (살전 2:18)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 (행 16:7)실 때도 있다. 이러한 것을 분별하는 것 역시 철저히 구해야 할 문제다.
세상에서 부단한 노력으로 술수나 중상모략도 마다 않고 부와 권력을 쟁취하는 사람들에 대해 신앙인들은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고, 신앙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들은 분명 헛된 것을 구하는 것이겠지만, 그 집요함은 배울만 하다. 특히 별 것 아닌 것으로 보이는 세상의 많은 일들이 그 안으로 들어가 직접 경험해 보면 그 만의 규칙과 규율들이 존재하고, 철학이 존재하며 부단한 노력이 요구됨을 발견한다. (전에 ‘극한 직업’이라는 프로그램을 즐겨 봤었다.)
신앙인들이 이생의 삶에서 추구할 것은 두 가지가 있는데 쉽게 말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겠다. 이는 다시 말해 주님의 성품을 추구함으로 그 거룩함을 닮는 것이고, 동시에 그러한 것이 다른 이들에게 가능하도록 복음을 전하고 나누는 것이겠다. 그런데 이러한 것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은혜 안에 철저함과 집요함이 필요하다. 물론 하나님의 방법으로.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 그 맘에 평강이 찾아옴은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하늘로부터 임함이로다
주님의 마음 본받아 살면서 그 거룩하심 나도 이루리
주님, 세상 사람들은 몇 십년 누리지도 못하는 것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지만, 우리는 영원한 것에 대해 적당한 태도를 취할 때가 많습니다. 그 거룩하심을 나도 이루어야 할텐데 지금 처럼 적당히 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이것이 생사의 문제임을 깊이 깨닫게 하소서. 내 마음에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며 그 끝을 알 수 없는 주님의 어떠함을 매순간 한발자국씩 추구하게 하소서. 믿음으로 발을 옮길 때 주께서 인도하시고 원수의 집요함을 삼키는 하나님의 열심을 배우게 하소서. 강건케 하소서. 이기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