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을 신봉하고 진화론을 맹신하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점집이나 무당들은 성황이다. 포스터 모더니즘을 넘어 사람들이 소위 ‘영적인’ 것에 더 관심을 가지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는 하지만, 원래 사람들은 논리나 이성보다는 과거에 대한 얽매임, 현재의 불만,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 등의 이유로 주술이나 점술 등에 의존한다. 크리스천들 역시 가끔 믿음을 이러한 점술 형태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예를 들어 아침 큐티를 하며 그날의 ‘운세?’를 보는 것이다. 큐티가 남용될 수 있는 요지다.
발람이 세 번째 예언을 하는데, 1절은 ‘발람이 자기가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심을 보고 전과 같이 점술을 쓰지 아니하고’ 라고 기록한다. 전에는 점술을 가지고 신탁을 받으려고 했지만 두번이나 축복하고 그에 대해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심을 경험하자 이제 더 이상 점술을 쓰지 않고 ‘하나님의 영’에 맡긴다. 발람의 점술에 대해서는 성경이 자세히 기록하지 않는데, 발람이 여호와 하나님의 선지자가 아님이 분명하다. 점술이나 주술은 무당들이나 하는 것이다. 하지만 궁금한 것은 ‘점술’로 ‘전능하신 (4절)’ 하나님을 부를 수 있는가, 여호와 하나님께서 한낱 일개 무당이 점술을 쓴다고 나타나시는가 라는 문제인데, 사실 그의 주술로 하나님이 그에게 오신 것이 아니라 지난 22:9에는 하나님이 먼저 그에게 나타나신 것을 볼 수 있고, 그 이유는 이스라엘을 축복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살다보면 종종 답답한 상황을 맞닥뜨릴 때가 있다. 어떨 때는 기도도 나오지 않고 말씀도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서 다른 방법으로 해결이나 조언을 구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하지만 이럴 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는 빌 4:6의 말씀처럼 나의 의지를 사용해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면 7절의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는 말씀을 경험한다. 말씀이 들어오지 않고 기도가 되지 않을 때, 마음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것 역시 쉽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럴 때가 믿음을 사용해야 할 때이고, 하나님 주신 의지가 발동될 때이다.
주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이것 저것 시도하지만, 다른 것 보다는 염려를 내려 놓고 먼저 주님 앞에 와서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나의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뢸 수 있는 마음 주소서. 이에 대한 훈련을 받게 하소서. 찬송과 감사에 능력이 있음을 경험합니다. 악한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축복할 수 있는 주님과 같은 마음 주소서.